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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 이효상 李孝祥Lee HyoSang

1906 ~ 1989

한국

작가약력

  • 1906∼1989. 시인·정치인.

작가 소개

1906년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한솔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대구 교남학교(嶠南學校)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여, 1940년 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해방 후 경상북도 학무국장을 지냈으며, 1952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1954년 벨기에의 루뱅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수학하였으며, 귀국한 뒤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실시된 7·29총선거에 경상북도의 참의원으로 무소속 출마하여 당선된 뒤 참의원 예산결산위원장을 지냈다.
1961년 5·16 이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1963년 2월 총선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대구 남구)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6, 7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7대 국회의장 시절인 1969년 8월 7일 개헌안 발의의 국회 보고를 생략한 채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당시 야당 의원들의 반대와 점거로 본회의장에서 본회의의 개최가 불가능해진 가운데, 이효상 국회의장은 9월 13일 자정까지 의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12시가 넘었으니 13일 본회의는 자동유회가 됐다. 14일은 일요일이니 국회를 열려면 특별결의가 있어야 되는데 아직 그런 결의가 없고 보면 속개는 불가능하고, 15일 상오 10시에 열겠다”고 말하며 의장실을 떠났다. 그 직후 9월 14일 새벽 1시경 이효상 국회의장과 공화당 의원들은 국회 제3별관으로 자리를 옮겨 삼선개헌안을 25분 만에 통과시켰다.
1971년 국회의장으로 재직 시절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유세반으로 각지를 순회하며 선거유세 활동을 벌였다. 유세 과정에서 안보 논리를 내세워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역설하였지만, 뒤이어 5월 25일 치러진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러나 1972년 10월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었고, 다음해 다시 치러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뒤 공화당 의장서리를 지냈다.
국제신문협회(IPU)·아시아신문협회(APU) 한국대표를 지냈고, 영남대학교 이사장, 1962년 대구매일신문사 이사 등을 지냈고,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가이면서도 시인으로 활동하였고, 시집으로는 『산』(1948)·『사랑』(1955)·『안경』(1960) 등이 있다. 그 밖에 『문화와 종교』·『나의 강산아』·『교육의 근본문제』·『인간문제』 등의 저서와 철학자 샤르댕(Chardin)의 전집을 번역, 간행하였다. 1979년 10·26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 고향인 대구 근교로 낙향하였다. 정계를 물러나 시작(詩作)과 샤르댕의 번역에 몰두하다 1989년 사망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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