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작품이미지

북저 김류 北渚 金瑬Kim Ryu

1571 ~ 1648

조선

작가약력

  • 1571(선조 4)∼1648(인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수렴(粹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찰방 훈(壎)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여물(汝岉)이며, 어머니는 현감 수강(壽岡)의 딸이다.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598년 그의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과 풍악을 벌여 놀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이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 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申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 반정의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반정의 주류들간의 갈등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행(南幸)하는 인조를 호가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우찬성을 거쳐 1624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 때 가도에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 그의 횡포를 막고, 명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그들의 불만을 시문으로 회유해 존경을 받는 등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장만(張晩) 밑에서 부체찰사로서 먼저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환도 후 장만·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께 청천강 남쪽의 안주(安州)를 중심으로 하는 도체찰사 중심의 적극적인 방어 체제 구축을 주장하였다. 그 해 우의정으로 승진되고 이듬 해에는 유효립사건(柳孝立事件)을 처리했으며, 진휼상사(賑恤上使)로서 기민 구제에 노력하였다.
한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령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총융사 이서(李曙), 찬획사(贊劃使) 이경직(李景稷)을 대동해 여러 산성을 순시하고 도형(圖形)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62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 해 정원군(定遠君)의 추숭 문제에 반대해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33년 다시 좌의정으로 올라 도체찰사를 겸직해 군령권까지 겸했으며, 뒤에 우의정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시 정원군 추숭 문제가 제기되자 역시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해 인조의 노여움을 사 1634년 다시 면직되었다.
1634년 인조가 전국에 교서를 내려 ‘화친을 끊고 방어를 갖출 것’을 선언하였다. 이 해 다시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관계 악화 방지에 대비하였다. 그 뒤 영의정이 되어 국정권도 아울러 장악하였다.
한편, 도체찰사로서 전국 각도의 속오군(束伍軍) 2만을 정선해 사전에 대비할 것을 청하고 이전에 구상해왔던 안주 중심의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안주가 무너지는 경우를 대비해 평양·황주·평산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곳의 산성에 주된 병력을 배치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아군의 편제된 산성 중심의 방어 체제를 미리 알고 도성을 직접 공격해오자 인조를 강도로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론이 엇갈린 가운데 적이 이미 서울 교외까지 진출하자 인조를 비롯한 군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듬 해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주화파의 뜻에 좇아 삼전도에서 맹약을 맺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을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왕세자의 환국을 주장하는 한편, 영춘추관사로서 실록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등에 의해 탄핵을 받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가, 이듬 해 다시 영의정으로 복위되었다. 이 해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학문은 서인 계열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계열을 이었으며, 특히 송익필(宋翼弼)을 사사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뒤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 등과 더불어 노서를 주도했으나, 되도록 서인과 남인을 같이 쓰려고 노력하였다.
문장은 기력(氣力)을 숭상하고 법도가 엄격했으며 시·율도 역시 정련청건(精鍊淸健 : 세련되고 맑으면서 건실함)하였다. 글 또한 기묘해 공경(公卿)의 비문을 많이 썼다.
저서로는 ≪북저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작가의 경매 작품

제 53회 여름경매

제22회 I Contact 온라인경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