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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운 박원근 赤雲 朴源根Park WonGeun

1912 ~ 1950

근대

작가약력

  • 1912~1950,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작가 소개

박원근은 1912년 보은면 교사리 405번지에서 항일운동가인 박치호(朴治鎬, 1895~1970)와 이영자 사이에 태어났다. 10남매 중 장손으로 태어난 박원근은 1927년 보은 삼산보통학교를 14회로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1930년 퇴학당했다. 박원근이 다니던 중앙고보는 1929년 12월9일 조회시간에 ‘광주진상보고’를 들은 7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경찰이 정문을 봉쇄하자 후문으로 나와 “조선학생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으며 경찰에 의해 다시 막히자 흩어져 경무대 앞에 모여 해산당할 때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이 날의 시위는 중앙고보를 포함해 경신학교, 보성고보, 휘문고보, 남대문 상업학교 등이 참여한 대규모 연합시위였다. 학생들의 요구는 ‘검거학생 석방’이었다. 일제는 경찰만 2천여 명을 동원해 1200여 명의 학생들을 검거했다. 박원근은 이 때문에 퇴학당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부친 박치호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독립과 사회의 평등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박원근은 삼인회에 가입하여 항일운동 활동을 하던 중 경성 본정경찰서에 검거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1935년 1월4일 만기출소했다. 석방된 후에도 박원근은 항일운동 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박원근은 여러 차례 형무소와 경찰서 유치장을 드나들었지만 전주형무소에서 출소하면서 섭섭하다는 듯이 “또 언제 여기에 들어오려나!” 했다고 한다. 출소 후 1942년경 결혼하여 슬하에 1녀 3남을 두었다.
해방 뒤 박원근이 보은 마차 임금조합에서 일하면서 때로 ‘적기가’를 부르거나 동료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6.25 사변이 발생한 이후 보은지역에 6사단 정보담당(G2) 군인 10여 명이 수리조합 사무실에 주둔하면서 보은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희생자 명단을 만들었고, 토지문제로 보은에 와 있던 박원근은 경찰서로 끌려가 1950년 7월10일 보은면 길상리 뒷산 미륵뱅이에서 학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박원근의 항일운동에 대하여 2008년 2월12일,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사실에 대하여 2009년 11월3일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항일운동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2010년 3월 건국훈장 애족장의 서훈을 결정했다.
출처/현장언론 민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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