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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당 법인 스님 碧眼堂 法印BeopIn Buddhist Monk

1901 ~ 1987

한국

작가약력

  • 1901∼1988. 승려.

작가 소개

성은 박(朴). 속명은 만수(晩洙). 본관은 밀양(密陽) 벽안은 법호이다. 아버지는 순진(朴淳鎭), 어머니는 월성 이(李)씨다. 경상북도 경주 출생. 어려서는 회재(晦齋) 문하 안강의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유서에 통하였다.
1935년 35세에 거사의 신분으로 금강산 마하연 설석우(薛石友) 선사 회상에서 안거 후 남방 여러 선사(禪寺)를 두루 역방하여 수행정진하다가 1938년 38세로 통도사에서 경봉(鏡峰)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1940년 천성산 내원사에서 하안거중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게송을 짓되, “대도(大道)는 원래 얽매임 없으니 현기(玄機)를 어찌 모양이나 소리에서 찾겠는가. 9순(旬)동안 닦은 심검(心劍) 서리마냥 차거우니 조사 관문 격파하여 본래대로 놓으리라(大道元來無繫縛/ 玄機何處覓形聲/九旬磨劍寒霜白/擊罷祖關各放行).”고 하였다.
1946년 통도사에서 은사인 경봉을 법사로 법을 이어 벽안이란 당호를 받아 경봉종사의 수법고족(受法高足:법을 이은 제자)이 되었다. 그 뒤 종립학교의 육성과 후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1955년부터 1974년까지 20년간 동국학원 및 원효학원 이사로 재직하였고, 1958년 원효학원 이사장, 1972년 동국학원 이사장에 각각 올랐다.
1959년 대본산 통도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한편 불교계의 정화 분규가 한창이던 1957년 중앙종회 부회장에 피선되어 분규 종식과 화합을 위해 진력, 1962년 비구·대처 통합종단이 구성되었을 때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초대 의장으로 선임된 후 제2대·제3대 의장을 연임하였다.
1964년 통도사 주지에 재취임하였고, 1966년 세계불교승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78년 조계종 원로원 원로로 추대되어 입적할 때까지 통도사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진력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동국대학교 정각원 현판, 성해당(聖海堂) 비문, 구하당(九河堂) 비문의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글씨는 서법이 단아하여 교계의 도속(道俗)이 매우 진중히 여기었다. 저술로는 해인사사적비, 구하당대종사비명 외 다수의 상량문이 있으며, 항상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행동하였고,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하였다.
비문에는 “선사는 천성이 교결(皎潔)하고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였으며 본사의 가람을 수호하고 종단의 제반사를 처리함에 있어 의당(宜當)함에 따라 공평무사하게 처결하였다. 공석에서는 추상같이 엄정하고 사석에서는 춘풍처럼 인자하며, 일상 수행은 근검정숙(勤儉靜肅)하여 고인의 사불망(思不妄) 면불괴(面不傀) 요불굴(腰不屈)의 유풍을 잘 지키셨다.”(徐燉撰)고 하였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일에도 경우를 잃지 말고 언제나 공심을 앞세워 행동하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쳤다. 불교 고적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만년에는 구산선문의 유적을 두루 돌아보고 불적 수호에 뜻을 두기도 하였다.
1987년 12월 25일(양력) 미질(微疾)을 보이더니 문인들에게 “영축편운(靈鷲片雲) 왕환무제(往還無際) 홀래홀거(忽來忽去) 여시여시(如是如是) [영축산의 구름 / 오고 감에 때(時)가 없네 /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가는 것 / 그렇고 그럴 뿐이네]”란 임종게를 남기고 통도사 적묵당에서 입적하였다. 다비는 종단 원로장으로 봉행 후 부도는 통도사 등록 부도원에 건립되었다. 세수 87세, 법랍 53세이다.
문도는 근암(近庵) 등 30여 인이니 문하에는 대강백인 종범(宗梵)·지안(志安)을 위시하여 문화재위원 범하(梵河)와 눌암(訥庵)·무주(無住)·지춘(志春)·지준(志準) 등이 있으며, 교육계에는 김철인(金哲印)·장충식(張忠植) 등이 모두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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