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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 김성곤 省谷 金成坤Kim SungGon
1913 ~ 1975
한국
작가약력
- 1913∼1975. 실업가·언론인·정치가.
작가 소개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성곡(省谷). 대구광역시 달성 출신. 아버지는 광도(光度), 어머니는 김봉옥(金鳳玉)이다.
1922년에 현풍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5년대구로 이사하여 달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8년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으며, 4학년 때 교내 항일운동의 주동으로 퇴학당하여 다시 상경,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한 뒤, 대구부청(大邱府廳)에서 4개월, 대구상공은행에서 1년 반 동안 근무하는 등의 짧은 봉급자생활을 청산하고, 사업에 뜻을 두어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1948년에는 고려화재해상보험과 자본금 1억 원의 금성방직을 설립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이 불탄 뒤,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을 인수하였다. 1956년 태평방직과 아주방직을 인수한 데 이어, 1958년 달성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9년국민학원(지금의 국민대학교)을 인수하고, 1960년 대한유도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62년국제신문편집인협회(IPI) 정회원이 되었다. 1962년에 이르러 쌍용양회를 설립하여 재벌의 위치를 굳혔다.
자유당의 이기붕(李起鵬)이 권유하여 국회에 들어갔던 탓으로 4·19혁명 후에는 한때 정계를 은퇴하였으나 5·16군사정변 후 다시 정계에 복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을 맡았으며, 1965년 공화당 재정위원장 및 당무위원이 되면서 정치·경제계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965년에는 성곡언론문화재단·성곡학술문화재단을 창립하여, 언론의 창달과 학술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다.
쌍용그룹·대한유도회 공동주최로 1976년부터 성곡기유도대회·1987년부터 성곡컵국제유도대회를 개최하여오다가 1993년부터 양대회를 격년제로 번갈아 개최하고 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공화당의 이른바 ‘당4역’으로서 집권정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오치성(吳致成)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세칭 ‘10·2항명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받아 사정의 경위조사를 받고, 공화당 당직과 국회의원직은 물론 공화당을 탈당하여야 하는 중징계를 받아 정계를 떠났다. 1973년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에 취임하였고 1974년 대한양회를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으나 1975년 갑자기 타계하였다.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1922년에 현풍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5년대구로 이사하여 달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8년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으며, 4학년 때 교내 항일운동의 주동으로 퇴학당하여 다시 상경,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한 뒤, 대구부청(大邱府廳)에서 4개월, 대구상공은행에서 1년 반 동안 근무하는 등의 짧은 봉급자생활을 청산하고, 사업에 뜻을 두어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1948년에는 고려화재해상보험과 자본금 1억 원의 금성방직을 설립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이 불탄 뒤,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을 인수하였다. 1956년 태평방직과 아주방직을 인수한 데 이어, 1958년 달성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9년국민학원(지금의 국민대학교)을 인수하고, 1960년 대한유도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62년국제신문편집인협회(IPI) 정회원이 되었다. 1962년에 이르러 쌍용양회를 설립하여 재벌의 위치를 굳혔다.
자유당의 이기붕(李起鵬)이 권유하여 국회에 들어갔던 탓으로 4·19혁명 후에는 한때 정계를 은퇴하였으나 5·16군사정변 후 다시 정계에 복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을 맡았으며, 1965년 공화당 재정위원장 및 당무위원이 되면서 정치·경제계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965년에는 성곡언론문화재단·성곡학술문화재단을 창립하여, 언론의 창달과 학술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다.
쌍용그룹·대한유도회 공동주최로 1976년부터 성곡기유도대회·1987년부터 성곡컵국제유도대회를 개최하여오다가 1993년부터 양대회를 격년제로 번갈아 개최하고 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공화당의 이른바 ‘당4역’으로서 집권정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오치성(吳致成)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세칭 ‘10·2항명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받아 사정의 경위조사를 받고, 공화당 당직과 국회의원직은 물론 공화당을 탈당하여야 하는 중징계를 받아 정계를 떠났다. 1973년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에 취임하였고 1974년 대한양회를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으나 1975년 갑자기 타계하였다.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