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 Service
- 작가검색
송강 권영록 松岡 權寧錄Kwon YeongRok
1916 ~ 1986
한국
공예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
작가약력
작가 소개
권영록은 예천읍 왕신리 139번지 출신으로, 남본1리로 옮겨 살았다. 본관은 안동, 태선(泰善)의 아들이다. 예천읍 노상리의 대창학원(大昌學院)을 졸업하였다.
활을 만드는 궁시장(弓矢匠)인 권영록은 16세 때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활을 만들기 시작하여 20여 만 장의 활을 만들기까지 평생을 활과 함께 생활하였다. 활 한 장 만드는 데에 4개월, 활몸 하나 만드는 데만 80일이 걸린다.
권영록은 자신이 만든 활을 전국 관광민예품 경진대회에 출품하여 특선을 수상한 후 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1971)되었고, 한국전통보존협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권영록의 집안은 400년 간 11대째 계속되는 활의 명문가이다. 조선 숙종 때 권영록의 10대조인 계황(繼黃)이 개성에서 예천으로 이사와 활을 만들기 시작한 후 대대로 내려왔다. 그 중 권영록의 6대조인 희직(熙直)은 순조의 명령으로 당시 남해안 깊숙이 들어와 노략질이 잦았던 왜구를 무찌를 활 10만 장을 만들어 바침으로써 교위 용장(校尉勇將)이란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권영록의 장남 오규(五奎)와 3남 오덕(五德)도 활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시위 소리만 들어도 내가 만든 활은 언제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훤히 알아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 과녁에 꽂힐 때의 쾌감은 활을 만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지요.""라고 말한 권영록은 연평균 150개의 활을 만들었다.
권영록은 수렵 도구에서 병기로, 병기에서 스포츠 기구로 변한 활과 더불어 평생을 살고, 활에 가문의 영예를 걸었다.
활을 만드는 궁시장(弓矢匠)인 권영록은 16세 때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활을 만들기 시작하여 20여 만 장의 활을 만들기까지 평생을 활과 함께 생활하였다. 활 한 장 만드는 데에 4개월, 활몸 하나 만드는 데만 80일이 걸린다.
권영록은 자신이 만든 활을 전국 관광민예품 경진대회에 출품하여 특선을 수상한 후 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1971)되었고, 한국전통보존협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권영록의 집안은 400년 간 11대째 계속되는 활의 명문가이다. 조선 숙종 때 권영록의 10대조인 계황(繼黃)이 개성에서 예천으로 이사와 활을 만들기 시작한 후 대대로 내려왔다. 그 중 권영록의 6대조인 희직(熙直)은 순조의 명령으로 당시 남해안 깊숙이 들어와 노략질이 잦았던 왜구를 무찌를 활 10만 장을 만들어 바침으로써 교위 용장(校尉勇將)이란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권영록의 장남 오규(五奎)와 3남 오덕(五德)도 활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시위 소리만 들어도 내가 만든 활은 언제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훤히 알아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 과녁에 꽂힐 때의 쾌감은 활을 만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지요.""라고 말한 권영록은 연평균 150개의 활을 만들었다.
권영록은 수렵 도구에서 병기로, 병기에서 스포츠 기구로 변한 활과 더불어 평생을 살고, 활에 가문의 영예를 걸었다.
출처/예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