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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 김재로 淸沙 金在魯Kim JaeRo
1682 ~ 1759
조선
작가약력
- 1682(숙종 8)∼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극형(克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징(澄)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구(構)이며, 어머니는 이몽석(李夢錫)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해 설서(說書)·검열(檢閱)·지평(持平)·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1716년 부수찬으로 선현(先賢)을 무고한 소론의 유봉휘(柳鳳輝)·정식(鄭栻)을 탄핵해 물러나게 하였다.
1718년 헌납(獻納)·동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대사성·승지를 거쳤으며, 전라도균전사(全羅道均田使)로 양안(量案 : 토지 대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호조참의·승지·부제학·이조참의 등을 거쳐, 이듬 해 대사간 및 병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내고 개성유수가 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이듬 해 울산으로 귀양갔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듬 해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양사(兩司)와 더불어 소론의 유봉휘·이광좌(李光佐) 등 5인을 죄주도록 청하고,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무고 사실을 상소해 사형하게 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좌빈객(左賓客)·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 해인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목사로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를 겸해 난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당쟁을 조성한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지돈녕부사 겸 수어사(知敦寧府使兼守禦使)를 지내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직해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1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복관(復官 : 관직의 회복)을 상소해 이를 달성시켰다. 그 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737년에도 당파 싸움을 벌여 탕평책을 어긴 죄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이듬 해 판중추부사로 주청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새로 간행된 ≪명사 明史≫를 얻어왔다.
1740년 영의정에 올라 1758년 관직을 떠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영의정을 지냈고, 그 밖에도 영중추부사를 역임해 세도가 매우 컸다. 1741년 신유대훈(辛酉大訓)이라 하여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사르고 특사하도록 하고, 5인의 역안(逆案 : 반역 죄인들의 죄를 기록한 문서)을 그대로 두도록 주장한 박문수와 이종성(李宗城) 등을 파직하게 하였다.
이후 소론은 관직이 추탈되는 반면 노론의 권력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임사화로 희생된 노론 4대신에게 시호를 내리고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조성복(趙聖復)·이홍술(李弘述) 등은 증직을 내렸다.
영조 초기에 탕평론을 주장했으나 결국 노론의 선봉에서 영수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한, 영의정 재임 기간 중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해 한천이혁절목(翰薦釐革節目) 10조와 과거의정절목(科擧議定節目) 8조를 제정하고 왕실의 상복제를 바로잡는 등 치밀하게 정사를 폈다.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거의 절반을 상신(相臣 : 의정부의 삼정승)으로 지냈다. 결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박식하며 예학에 깊었고, 상하가 신망하는 재상으로서의 풍모를 지녔다. 벼슬을 그만둔 뒤 집에 있으면서도 국사를 잊지 않았다.
영조는 숙종의 뜻에 따라 그를 기용해 아꼈으며, 손수 쓴 글을 내려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봉조하(奉朝賀)로 78세에 죽으니 영조는 그 집에 직접 조문하고 제문도 친히 지어 보냈다. 죽은 이듬 해 기사대신(耆社大臣)이 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천의소감언해 闡義昭鑑諺解≫와 ≪난여 爛餘≫가 있다. 편저로는 ≪예기보주 禮記補註≫·≪청풍김씨세보≫·≪좌씨집선속 左氏輯選續≫·≪금석록 金石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해 설서(說書)·검열(檢閱)·지평(持平)·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1716년 부수찬으로 선현(先賢)을 무고한 소론의 유봉휘(柳鳳輝)·정식(鄭栻)을 탄핵해 물러나게 하였다.
1718년 헌납(獻納)·동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대사성·승지를 거쳤으며, 전라도균전사(全羅道均田使)로 양안(量案 : 토지 대장)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호조참의·승지·부제학·이조참의 등을 거쳐, 이듬 해 대사간 및 병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내고 개성유수가 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이듬 해 울산으로 귀양갔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듬 해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양사(兩司)와 더불어 소론의 유봉휘·이광좌(李光佐) 등 5인을 죄주도록 청하고, 소론 김일경(金一鏡)의 무고 사실을 상소해 사형하게 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좌빈객(左賓客)·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 해인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목사로 호서안무사(湖西安撫使)를 겸해 난의 수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당쟁을 조성한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지돈녕부사 겸 수어사(知敦寧府使兼守禦使)를 지내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직해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1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의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복관(復官 : 관직의 회복)을 상소해 이를 달성시켰다. 그 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737년에도 당파 싸움을 벌여 탕평책을 어긴 죄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이듬 해 판중추부사로 주청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새로 간행된 ≪명사 明史≫를 얻어왔다.
1740년 영의정에 올라 1758년 관직을 떠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10여 년간 영의정을 지냈고, 그 밖에도 영중추부사를 역임해 세도가 매우 컸다. 1741년 신유대훈(辛酉大訓)이라 하여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사르고 특사하도록 하고, 5인의 역안(逆案 : 반역 죄인들의 죄를 기록한 문서)을 그대로 두도록 주장한 박문수와 이종성(李宗城) 등을 파직하게 하였다.
이후 소론은 관직이 추탈되는 반면 노론의 권력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임사화로 희생된 노론 4대신에게 시호를 내리고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조성복(趙聖復)·이홍술(李弘述) 등은 증직을 내렸다.
영조 초기에 탕평론을 주장했으나 결국 노론의 선봉에서 영수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한, 영의정 재임 기간 중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해 한천이혁절목(翰薦釐革節目) 10조와 과거의정절목(科擧議定節目) 8조를 제정하고 왕실의 상복제를 바로잡는 등 치밀하게 정사를 폈다.
5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거의 절반을 상신(相臣 : 의정부의 삼정승)으로 지냈다. 결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박식하며 예학에 깊었고, 상하가 신망하는 재상으로서의 풍모를 지녔다. 벼슬을 그만둔 뒤 집에 있으면서도 국사를 잊지 않았다.
영조는 숙종의 뜻에 따라 그를 기용해 아꼈으며, 손수 쓴 글을 내려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봉조하(奉朝賀)로 78세에 죽으니 영조는 그 집에 직접 조문하고 제문도 친히 지어 보냈다. 죽은 이듬 해 기사대신(耆社大臣)이 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천의소감언해 闡義昭鑑諺解≫와 ≪난여 爛餘≫가 있다. 편저로는 ≪예기보주 禮記補註≫·≪청풍김씨세보≫·≪좌씨집선속 左氏輯選續≫·≪금석록 金石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