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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讓寧大君Prince YangNyeong

1394 ~ 1462

조선

작가약력

  • 1394(태조 3)∼1462(세조 8). 조선 전기의 왕자.

작가 소개

1394년 태종 이방원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이며, 부인은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이다. 이름 이제(李禔)이고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1404년(태종 4) 10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406년 부왕 태종이 어린 세자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자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이 어린 양녕에게 의탁하여 권세를 탐하다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어린시절부터 정치적 파장이 있었다.
양녕은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사냥을 좋아했고 기생을 탐하여 궁궐 내 처소에 여자를 불러들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자를 탐하여 임신까지 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궐 밖에서 아이를 낳게되었고 그의 비행을 감싸주던 장인 김한로는 귀양을 가게되었다. 황희도 세자 양녕을 두둔하다 처벌을 받았다. 결국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세자되어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되었다. 양녕이 폐세자 되자 뒷날 세종이 된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당시 양녕은 자신의 비행을 충녕이 태종에게 고한 것으로 알고 충녕을 원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양녕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잘 알았기에 그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양녕을 탄핵하는 상소는 모두 물리고 받지 않았다고 전한다.
양녕이 궁궐을 나와서는 타고난 그의 기질대로 한량으로 생활하였는데 시, 서예, 음악 등 예술에 관심을 가졌고 일생을 풍류객으로서 자유분방한 생을 지냈다. 호탕한 기질로 술을 좋아하고 기생들과 어울렸으나 이러한 기질이 정도를 지나쳐 그의 문란함은 세종에게 여러차례 상소로 올려지기도 했다. 특히 여자와 어울린 간통사건이 많았으며 양녕의 자녀들도 방탕한 생활로 세간에 회자되었다.
문종이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정치적으로는 세조를 지지하였고 그가 일으킨 계유정란에는 직접적 개입하지 않았지만 세조가 조카(단종)와 정적(김종서 등 사육신)을 살해하는데 동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에도 그의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세조를 지지한 덕분에 오히려 보호를 받았다.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서울 숭례문의 편액(扁額) ‘崇禮門(숭례문)’이 그의 필적이라는 설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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