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 Service
- 작가검색
삼연 곽상훈 三然 郭尙勳Kwak SangHun
1896 ~ 1980
한국
작가약력
- 1896∼1980. 독립운동가·정치가
작가 소개
부산 동래 출신. 호는 삼연(三然). 1948년 제헌의원부터 2대∼5대 민의원에 당선 되었다. 국회 전원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의장 등을 지냈다. 4·19 직후 1960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잠시 지냈다. 통일원고문·육영재단 이사장를 지냈다.
1919년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인천에서 학생만세운동을 조종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간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본인 선생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지만, 경인선 열차를 중심으로 계속 일본인 학생과의 싸움을 주동하다가 일본 경찰로부터 그의 고향인 동래지역으로 주거제한을 받았다. 이때 타락생활을 극복하라는 뜻으로 선배로부터 선물받은 아호가 ‘삼연’이다. 삼연은 산자연(山自然)·수자연(水自然)·아자연(我自然)으로 ‘인생을 느긋하게 태어난 대로 살아가라’는 뜻이라 한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는 한국인 희생자의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하였으며, 그로 인해 상해로 망명생활을 하였다.
귀국 후 일본의 예비검속에 걸려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바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공천 탈락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9년〈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제정되자 검찰차장에 임명되어 친일분자 색출에 힘썼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을 지냈으며, 1954년 제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서는 부의장에 뽑혔다. 제헌 및 제2대 의원 때는 원내활동을 하면서 이승만정권을 지지하였으나, 제3대 국회에서는 반독재·민주수호에 앞장섰다.
1955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되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60년4·19로 자유당 국회가 마비되자 개헌국회의 의장으로 보선되었다. 그 해 5월 17일부터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들어선 22일까지 1주일 동안 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의 직무를 맡았다.
그 해 7월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 민주당에 의한 국회 지배 아래에서 제5대 민의원 의장이 되었다. 민주 당내 신·구파의 정쟁에서는 신파의 장면(張勉)을 지지하였다.
국회의장의 자격으로 36개국 순방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여행하던 중 5·16군사정변을 맞았다. 1961년 5월, 귀국 즉시 민주당을 탈당, 정계에서 일단 은퇴한 뒤 박정희 정권 지지로 변신하였고, 이로 인하여 많은 동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69년통일원고문과 육영재단이사장에 취임하고, 1971년한국장학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1973년 유신헌정(維新憲政)의 출범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들어가 그 운영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80년 1월 서울 우이동 자택에서 85세로 사망했으며,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6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19년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 인천에서 학생만세운동을 조종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간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본인 선생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지만, 경인선 열차를 중심으로 계속 일본인 학생과의 싸움을 주동하다가 일본 경찰로부터 그의 고향인 동래지역으로 주거제한을 받았다. 이때 타락생활을 극복하라는 뜻으로 선배로부터 선물받은 아호가 ‘삼연’이다. 삼연은 산자연(山自然)·수자연(水自然)·아자연(我自然)으로 ‘인생을 느긋하게 태어난 대로 살아가라’는 뜻이라 한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는 한국인 희생자의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하였으며, 그로 인해 상해로 망명생활을 하였다.
귀국 후 일본의 예비검속에 걸려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바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공천 탈락에 불만을 품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9년〈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제정되자 검찰차장에 임명되어 친일분자 색출에 힘썼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을 지냈으며, 1954년 제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서는 부의장에 뽑혔다. 제헌 및 제2대 의원 때는 원내활동을 하면서 이승만정권을 지지하였으나, 제3대 국회에서는 반독재·민주수호에 앞장섰다.
1955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되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60년4·19로 자유당 국회가 마비되자 개헌국회의 의장으로 보선되었다. 그 해 5월 17일부터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들어선 22일까지 1주일 동안 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의 직무를 맡았다.
그 해 7월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 민주당에 의한 국회 지배 아래에서 제5대 민의원 의장이 되었다. 민주 당내 신·구파의 정쟁에서는 신파의 장면(張勉)을 지지하였다.
국회의장의 자격으로 36개국 순방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여행하던 중 5·16군사정변을 맞았다. 1961년 5월, 귀국 즉시 민주당을 탈당, 정계에서 일단 은퇴한 뒤 박정희 정권 지지로 변신하였고, 이로 인하여 많은 동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69년통일원고문과 육영재단이사장에 취임하고, 1971년한국장학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1973년 유신헌정(維新憲政)의 출범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들어가 그 운영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80년 1월 서울 우이동 자택에서 85세로 사망했으며,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6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