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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석 김진만 肯石 金鎭萬Kim JinMan

1876 ~ 1933

근대·현대

한국화

작가약력

  • 대구 출생, 석재 서병오 사사.
  • 1915 이후 독립운동으로 옥고, 교남서화회 회원 등
  • 전시
  • 1980 개인전 유작전(대국맥향화랑)
  • 1992 향토작고서화가작품전(대구문화예술회관)
  • 수상
  • 1977 건축훈장 국민장

작가 소개

1876년 8월 대구에서 태어난 긍석은 부유한 집안에서 한학과 서화를 배우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긍석은 석재의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주유를 모두 함께했다. 1차 주유(1898∼1902) 때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등을 석재와 함께 주유하며 여러 유명 예술인과 정치인 등을 만나 교유했고, 2차 주유 때(1908∼11)도 석재를 수행해 상하이와 칭다오(靑島) 등을 돌며 포화, 손문, 제백석 등 많은 현지 인사들과 교유했다.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주유는 긍석의 작품세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긍석은 1915년 대한광복회에 가입,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1915∼18)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에 역점을 두고, 친일부호 처단 등도 당면과제로 삼았다. 경북 풍기에서 발족된 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가 모여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했다. 총사령은 박상진이 맡았다. 그는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1916년 8월 총사령으로부터 받은 권총을 휴대하고 김진우, 정운일, 최병규 등과 대구 부호 서우순(긍석의 장인)의 집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그의 집사가 달려와 격투가 벌어지면서, 긍석의 동생 김진우가 권총을 발사하고 도망을 가게 되었다. 일행은 일단 탈출했으나 곧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유명한 ‘대구권총사건’이다. 긍석은 1917년 이 사건의 주모자로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1930년 출옥했다. 긍석은 출옥 후에도 석재의 사랑채를 드나들며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꾸려갔다. 1931년에는 팔공산 동화사 사적비 글씨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34년 초 대구 자택에서 석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긍석은 오랜 기간 독립운동과 옥중생활을 했기 때문에 서화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남아있는 작품도 석재나 죽농에 비해 적다.
그가 남긴 작품은 기명절지(器皿折枝)와 묵죽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명절지 작품은 구도 감각과 묘사력이 요구되는 분야로, 긍석의 작품을 보면 그가 남다른 회화적 소질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묵죽을 비롯한 사군자 작품에는 석재의 서풍과 함께 중국 상하이의 해상화파(海上畵派) 영향이 드러난다. 묵란은 민영익, 묵매는 오창석, 묵죽은 포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석재와 함께한 중국 주유를 통해 접한 해상화파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법에는 두 가지 도가 있으니 하나는 그 형상을 모방하는 것이고, 하나는 정신을 그리는 것이다. 모방은 쉬우나 정신을 그리기는 어렵다(書法二道 一是模其形者也 一是寫其神者也 模也易寫神難).’
긍석이 작품 화제를 통해 드러낸 서화관이다. 긍석은 이처럼 석재와 마찬가지로 문인화에서 형상의 모방이 아니라 정신을 강조했다. 이런 서화관은 영남문인화 형성의 핵심이 된다. 긍석의 묵죽은 특히 그의 성품을 드러내듯 강직하고 기교를 찾아볼 수 없는 필법을 보여준다.
㜀ᄀԀ출처/영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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