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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옹 진동익 淸翁 秦東益Jin DongIk

1777 ~ ?

조선

서화

작가약력

  • 1777(정조 1)~미상[1830(순조 30) 이후]. 조선 후기의 역관·서화가.

작가 소개

자는 직재(直哉), 호는 청옹(淸翁)이며, 본관은 풍기(豊基)이다. 글씨를 잘 썼으며, 관직은 왜학(倭學) 교회(敎誨)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조부는 전의감직장(典醫監直長) 진재백(秦載白)이며, 부친은 내의(內醫)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진동(秦洞)이다. 서예가 진용(秦溶)의 조카이며, 동생 진동석(秦東奭)도 내의(內醫)로 글씨를 잘 썼다. 진동익의 일본어 역관으로서의 생애는 『일성록』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사서(史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진동익은 37세 때인 1809년 역과(譯科) 증광시에 7위로 합격하였다. 『잡과방목(雜科榜目)』 39세 때인 1811년에는 마지막 조선통신사의 차상통사(次上通詞)로서 대마도를 다녀왔다. 1808년 4월 일본 관백(關白)의 손자가 죽자 조위부사 박기수(朴綺壽)를 수행하여 도해역관(渡海譯官)으로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 『변(邊例集要)』 권18, (渡海) 무인조 1822년 8월16일에는 정릉사초수개(貞陵莎草修改) 별간역(別看役)으로 임명되었고, 8월 24일에는 그 공으로 상당직(相當職)을 제수받았다. 같은 1822년 10월4일에는 혜릉사초수개(惠陵莎草修改)에 참여하여 포상받았다.
1823년 4월 6일에는 부묘도감(祔廟都監) 별간역에 임명되었고, 5월 3일에는 일이 끝나고 포상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825년 4월 18일에는 부산에서 표류민이 왜선(倭船)을 타고 나간 사건과 관련하여 ‘훈도(訓導)’ 벼슬로 언급되었다. 1829년 3월27일에도 수문통사(守門通事) 배말돈(裵末敦)이 왜인(倭人)에 의해 피살된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되었다. 1830년 5월 9일에는 장례도감(葬禮都監) 별간역에 임명되었고, 같은 1830년 8월 27일자 『실록』에는 우피(牛皮)와 홍삼 등 대일무역(對日貿易)과 관련하여 동생 진동석과 함께 탄핵받은 기사가 보인다.
이상의 여러 기사들은 모두 진동익이 일본어 역관, 혹은 통신사 수행원으로서 부산 근처나 서울에서 실무에 종사하던 사실들의 기록이다. 마지막 1830년 기록은 그의 나이 58세 때인데, 이때는 진동익이 동생과 함께 대일무역을 통해 상당히 부를 축적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에 전하는 진동익의 필적들은 역관으로서의 활동 중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생애에서는 예술가로서의 행적이 뚜렷하지 않으며, 현재까지 간간히 알려진 필적들도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존 출간된 사전에 ""초상화를 잘 그려 1830년 순조어진을 그렸다""고 기재되었으나 이는 오류이다. 규장각 소장 『어진도사사보(御眞圖寫事寶)』에 의하면 이 해 순조어진을 그린 화가는 김건종 · 이수민 · 김하종 · 장준량 · 박기준만 기록되었고 진동익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11년 일본에 통신사 수행원으로 갔을 때 제작한 서예 작품들과 그림 위에 쓴 제기(題記)들이 일본 쇼코쿠지(相國寺)에 전해지고 있다.
출처/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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