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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文在寅Moon JaeIn
1953 ~
한국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작가약력
작가 소개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1953년 경상남도 거제에서 월남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6·25전쟁 때 피난하여 막노동과 계란 행상으로 생계를 꾸렸다. 1965년 부산남항초등학교, 1968년 경남중학교를 거쳐 1971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2년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인 1975년 4월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구속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경희대에서 제적되었다. 같은 해 8월 강제징집되어 육군에 입대하여 특전사령부 특전여단에서 복무하였다.
1978년 제대 후 복학하여 1980년 졸업하였다. 이해에 제22회 사법고시에 응시하였고, 신군부(新軍府)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실시한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1981년 대학 후배인 김정숙과 결혼하였고,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였으나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같은 해 부산에서 당시 변호사이던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시작하였고, 이후 부산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등을 맡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면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95년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하였고,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3년 2월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 비서실 민정 수석비서관을 지내다가 건강 악화로 사직하였으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를 계기로 청와대에 복귀하여 시민사회 수석비서관이 되었으며, 2007년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어 퇴임 때까지 보필하였다. 참여정부가 마감한 뒤 공직에서 물러나 변호사로 일하다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여 서거한 뒤 국민장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2011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비사(秘史) 등을 담은 《문재인의 운명》을 출간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같은 해 9월 발족한 ‘혁신과 통합’ 공동 상임대표를 맡아 야권 통합을 추진하였고, 민주당·한국노총과 통합하여 창당한 민주통합당에 상임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부산광역시 사상구에서 당선된 뒤 같은 해 6월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2012년 9월 민주통합당의 경선에서 누적 투표율 56.52%를 획득하여 제18대 대통령선거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되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의 사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루었다.
2012년 12월 19일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과 일자리 혁명, 상생·협력의 경제민주화, 복지국가와 성평등 사회, 국민이 주인인 정치, 평화·번영의 북방경제시대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와 경쟁하였으나 48.02%(1469만 2632표)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쳐 박근혜 후보에 3.53%(108만 496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후 한동안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다가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선출되어 2016년 1월까지 당명을 개칭한 더불어민주당의 대표직을 맡다가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당권을 일임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파면되자 제19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누적 득표율 57%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어 5월 9일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과 일자리 확대, 정치권력 및 권력기관 개혁, 반부패·재벌 개혁, 한미동맹 강화와 자주국방력 확보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득표율 41.1%(1342만 3800표)로 당선되었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 소통과 통합, 적폐 청산을 강조하여 대세를 유지하면서 경남·경북·대구를 제외한 광역시·도 전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며,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2위와 가장 큰 표차(557만 951표)를 기록하며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2015년과 2016년 연속하여 모범적인 국회의원에게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는 《사람이 먼저다》《문재인이 드립니다》(2012), 《대한민국이 묻는다(완전히 새로운 나라, 문재인이 답하다)》(2017) 등이 있다.
1978년 제대 후 복학하여 1980년 졸업하였다. 이해에 제22회 사법고시에 응시하였고, 신군부(新軍府)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실시한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1981년 대학 후배인 김정숙과 결혼하였고,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였으나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같은 해 부산에서 당시 변호사이던 노무현을 만나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시작하였고, 이후 부산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등을 맡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면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95년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하였고,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3년 2월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 비서실 민정 수석비서관을 지내다가 건강 악화로 사직하였으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를 계기로 청와대에 복귀하여 시민사회 수석비서관이 되었으며, 2007년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어 퇴임 때까지 보필하였다. 참여정부가 마감한 뒤 공직에서 물러나 변호사로 일하다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여 서거한 뒤 국민장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2011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비사(秘史) 등을 담은 《문재인의 운명》을 출간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같은 해 9월 발족한 ‘혁신과 통합’ 공동 상임대표를 맡아 야권 통합을 추진하였고, 민주당·한국노총과 통합하여 창당한 민주통합당에 상임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부산광역시 사상구에서 당선된 뒤 같은 해 6월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2012년 9월 민주통합당의 경선에서 누적 투표율 56.52%를 획득하여 제18대 대통령선거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되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의 사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루었다.
2012년 12월 19일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과 일자리 혁명, 상생·협력의 경제민주화, 복지국가와 성평등 사회, 국민이 주인인 정치, 평화·번영의 북방경제시대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와 경쟁하였으나 48.02%(1469만 2632표)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쳐 박근혜 후보에 3.53%(108만 496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이후 한동안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다가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선출되어 2016년 1월까지 당명을 개칭한 더불어민주당의 대표직을 맡다가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당권을 일임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파면되자 제19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누적 득표율 57%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어 5월 9일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과 일자리 확대, 정치권력 및 권력기관 개혁, 반부패·재벌 개혁, 한미동맹 강화와 자주국방력 확보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득표율 41.1%(1342만 3800표)로 당선되었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 소통과 통합, 적폐 청산을 강조하여 대세를 유지하면서 경남·경북·대구를 제외한 광역시·도 전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며,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2위와 가장 큰 표차(557만 951표)를 기록하며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2015년과 2016년 연속하여 모범적인 국회의원에게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는 《사람이 먼저다》《문재인이 드립니다》(2012), 《대한민국이 묻는다(완전히 새로운 나라, 문재인이 답하다)》(2017) 등이 있다.
출처/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