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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遲耘 金綴洙Kim CheolSu

1893 ~ 1986

근대·현대

작가약력

  • 1893(고종 30)∼1986. 사회주의 노동운동가.

작가 소개

김창율(金昌律)·김창근(金昌根)이라고도 불리었으며 호는 지운(芝雲:遲耘)이다. 1893년 5월 25일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촌리에서 쌀 위탁판매업을 하는 김영구(金永九)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남조선노동당 총무부장을 지낸 김광수(金光洙)의 형이다.
군산의 금호학교(金湖學校)를 졸업한 뒤 1912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과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였다. 1916년 장덕수(張德秀)·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으며, 정노식(鄭魯湜) 및 중국인과 함께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한 뒤 같은해 귀국하였다.
1921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이동휘(李東輝)·안병찬(安秉讚)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였으며, 1923년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중 검거되어 1년 간의 거주제한령을 받았다.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 조직부장이 되었고, 1926년 6·10만세사건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 간부진이 검거되자 9월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9년 6월 제3차 및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와해된 당을 재건하기 위해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에서 윤자영(尹滋瑛)·김영만(金榮萬)·김영식(金泳植)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이어 12월 강문수(姜文秀)·박원진(朴元鎭)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이듬해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38년 출감하였으나 1940년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아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복 직후 공주형무소에서 출감하여 정백(鄭栢)·이영(李英)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장안파(長安派:종로의 장안빌딩에서 창립하여 붙여진 이름)를 결성하였다.
1946년 8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은 당 대회를 소집하여 토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헌영(朴憲永)의 독선적 당 운영을 비난하여 무기한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같은해 11월 여운형(呂運亨)의 사회노동당 임시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6년 11월 사회노동당 간부진이 탈당하고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자 이에 실망하여 1947년 2월 사회노동당을 해체하였고, 여운형이 그해 7월에 암살당하자 정계에서 은퇴, 낙향하였다.
한편, 1956년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가가 신익희(申翼熙)라 생각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출처/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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