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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남 유계 市南 兪棨Yu Gye

1607 ~ 1664

조선

작가약력

  • 1607(선조 40)∼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작가 소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할아버지는 정언·지평수안군수를 지낸 대경(大敬)이고, 아버지는 참봉양증(養曾)이며, 어머니는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병조참판이신(以信)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1630년(인조 8)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636년병자호란 때 시강원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다.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서실(書室)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가례집해(家禮集解)』를 개작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작하였다.
1644년주서로 기용되었고, 1646년무안현감이 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부교리로서 왕의 장례 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라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자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宗)’자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1652년(효종 3)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송준길 등의 추천으로 시강원문학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1659년병조참지로서 비변사부제조를 겸임하고, 이어서 대사간·공조참의·대사성·부제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 해에 효종이 죽고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였으며, 3년설을 주장한 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 등의 남인을 논박하여 유배 또는 좌천시켰다. 1662년(현종 3)예문관제학을 거쳐 1663년대사헌·이조참판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는 이이(李珥)와 김장생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예론의 입장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을 본받아 고금의 치도(治道)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피력한 『강거문답(江居問答)』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이이의 학설을 요약하여 “정치의 근본은 수기(修己)이고, 정치의 핵심은 임관(任官)이며, 정치의 급무는 구민(救民)이다”라고 보고 그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또한 주자의 『가례』를 기본으로 하고, 『의례(儀禮)』·『주례(周禮)』·『대례(戴禮)』 등 여러 경전의 내용을 뽑고 주를 붙여 ‘원(源)’이라 하며, 후대의 여러 유학자들의 예설을 조사하여 ‘유(流)’라 하여 역사상의 예설들을 밝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하였다. 이는 김장생의 예설에 토대를 둔 것이며, 훗날 윤선거와 공편했는지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말년에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본받아 노론 정권하의 고려사에 대한 역사관을 대변해 주는 강목체(綱目體)의 『여사제강(麗史提綱)』을 편찬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는 문집인 『시남집』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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