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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노수현 心汕 盧壽鉉Noh SooHyun
1899 ~ 1978
한국
한국화
작가약력
- 1899∼1978. 한국화가.
작가 소개
호는 심산(心汕). 황해도 곡산(谷山) 출신. 1914년에 보성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그리고 서화미술회강습소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의 지도 아래 전통 화법을 수학하였다. 1918년에 정규 과정을 졸업하였다.
노수현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조부 밑에서 자랐다. 조부인 노헌용(盧憲容)은 3·1 운동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가, 금융인, 교육자였다.
1913년 고향을 떠나 개성에서 살다가 다시 서울로 이사하여 보성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에 보성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고 3년 과정의 서화미술회강습소에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晉) 등으로부터 서화를 배웠다. 1918년 졸업 후 안중식의 화실인 경묵당에서 이상범과 함께 기거하였는데 이때 안중식으로부터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받았다. 1920년에는 김은호(金殷鎬), 오일영(吳一英), 이용우(李用雨), 이상범(李象範) 등과 함께 창덕궁 벽화제작에 참여하여 「조일선관(朝日仙觀)」을 제작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삽화, 만화, 도안을 담당하였고, 1923년조선일보사로 옮겨 시사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였다.
1921년부터 서화협회 전람회에 정회원으로 해마다 출품하였으며 1922년부터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여 입선·특선을 거듭하였다. 1923년서화미술회 동문인 이용우·이상범·변관식(卞寬植)과 함께 신구화도연구(新舊畵道硏究)를 위하여 동인단체인 동연사(同硏社)를 만들었으며, 1923년 11월이상범과 노수현의 2인전(二人展)을 열었다. 이때부터 노수현은 종래의 관념적 산수화법을 극복하고 사생에 입각한 사실적인 수묵산수화를 그렸고, 바위와 암산의 골격과 이상화된 산수경을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질감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양식을 정립시켰다.
1940년 고희동, 김은호, 변관식, 이상범, 이용우 등과 함께 ‘10명가산수화전’에 출품하였고, 이 무렵부터 심산화숙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과에 출강하였고, 1949년 국전이 창립되자 1회부터 줄곧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71년과 1972년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한국동양화6대가전’에 초대되었고, 작고하기 1년 전인 1974년에는 동아일보사 주최로 『심산 노수현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대표작으로 「산촌(山村)」(1956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계산정취(谿山情趣)」(1957년, 리움 소장) 등이 있다.
1955년 서울시 문화상, 1958년 예술원상(공로상), 195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197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을 수상했다. 2000년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심산 노수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렸다.
노수현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조부 밑에서 자랐다. 조부인 노헌용(盧憲容)은 3·1 운동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가, 금융인, 교육자였다.
1913년 고향을 떠나 개성에서 살다가 다시 서울로 이사하여 보성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에 보성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고 3년 과정의 서화미술회강습소에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晉) 등으로부터 서화를 배웠다. 1918년 졸업 후 안중식의 화실인 경묵당에서 이상범과 함께 기거하였는데 이때 안중식으로부터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받았다. 1920년에는 김은호(金殷鎬), 오일영(吳一英), 이용우(李用雨), 이상범(李象範) 등과 함께 창덕궁 벽화제작에 참여하여 「조일선관(朝日仙觀)」을 제작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삽화, 만화, 도안을 담당하였고, 1923년조선일보사로 옮겨 시사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였다.
1921년부터 서화협회 전람회에 정회원으로 해마다 출품하였으며 1922년부터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여 입선·특선을 거듭하였다. 1923년서화미술회 동문인 이용우·이상범·변관식(卞寬植)과 함께 신구화도연구(新舊畵道硏究)를 위하여 동인단체인 동연사(同硏社)를 만들었으며, 1923년 11월이상범과 노수현의 2인전(二人展)을 열었다. 이때부터 노수현은 종래의 관념적 산수화법을 극복하고 사생에 입각한 사실적인 수묵산수화를 그렸고, 바위와 암산의 골격과 이상화된 산수경을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질감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양식을 정립시켰다.
1940년 고희동, 김은호, 변관식, 이상범, 이용우 등과 함께 ‘10명가산수화전’에 출품하였고, 이 무렵부터 심산화숙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과에 출강하였고, 1949년 국전이 창립되자 1회부터 줄곧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71년과 1972년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한국동양화6대가전’에 초대되었고, 작고하기 1년 전인 1974년에는 동아일보사 주최로 『심산 노수현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대표작으로 「산촌(山村)」(1956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계산정취(谿山情趣)」(1957년, 리움 소장) 등이 있다.
1955년 서울시 문화상, 1958년 예술원상(공로상), 195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197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을 수상했다. 2000년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심산 노수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렸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