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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 안종화 涵齋 安鍾和Ahn JongHwa

1860 ~ 1924

조선·근대

작가약력

  • 1860(철종 11)∼1924. 근대 계몽기 역사학자이자 교육자.

작가 소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응(士應). 호는 함재(涵齋). 홍양(洪陽) 출신으로 안기원(安基遠)의 아들이다. 개항기로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역사학자이자 계몽운동가·교육자로 활동하였다. 대한 제국기에는 법부참서와 중추원 의관을 지냈으며, 을사늑약 폐기 상소가 수용되지 않은 뒤에 역사 연구와 지식 보급 및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활동에 참여하면서 다수의 역사·지리 교과서를 개발하였다.
1894년(고종 3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궁내부낭관(宮內府郎官)·법부참서(法部參書)·세자시강원시독(世子侍講院侍讀)을 거쳐 중추원의관 등을 지냈다. 부친은 추사 김정희와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안종화가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을 계승하였음을 의미한다. 1878년 최초로 『동사취요』라는 역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동사절요』의 토대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의 상소에 이어 이우면(李愚冕)·박봉주(朴鳳柱)·윤두병(尹斗炳) 등과 함께 조약폐기와 5적의 주살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1908년 1월 보성소학교 내에서 창립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의 평의원으로 선정(選定)되었으며,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에 ‘위선최락(爲善崔樂)’, ‘학문 필요(學問必要)는 재시품행(在施品行)’, ‘기승어리(氣勝於理)’ 등의 글을 남겨 선비로서의 윤리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으며, 1924년 사망하였다.
역사서로 『동사취요』(1878, 필사본)·『동사절요(東史節要)』(1904)·『국조인물지(國朝人物誌)』(1907) 등이 있다. 안종화의 역사 저술이 개항기부터 이루어진 점을 고려할 때, 안종화의 역사 인식은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단군을 최초의 성인(聖人)으로 인식하고,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다루고자 노력한 점은 안종화의 역사의식이 민족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조인물지』는 조선시대 인물 3,000명을 다룬 것으로, 인물 중심의 한국사를 정리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을사늑약 이후 대한자강회와 기호흥학회 활동을 하면서 다수의 교과서를 편찬하였는데, 『초등본국역사(初等本國歷史)』(1909, 광덕서관)·『초등만국지리(初等萬國地理)』(1909, 휘문관)·『초등대한지리(初等大韓地理)』(1910, 광덕서관) 등의 역사· 지리 교과서와 『초등생리위생대요(初等生理衛生大要)』(1908, 휘문관)·『초등위생학교과서(初等衛生學敎科書)』(1909, 광덕서관) 등의 위생 교과서가 있다.
이처럼 여러 분야의 교과서를 편찬한 것은 교과서가 부족했던 근대 계몽기에 애국 계몽가나 지식인들이 지식 보급의 차원에서 전공이나 전문 분야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여러 분야의 교과서를 찬술한 저술 풍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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