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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영 吳知泳Oh JiYeong

1868 ~ 1950

조선·근대

작가약력

  • 1868(고종 5)∼1950. 조선 말기의 종교인·농민운동가.

작가 소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양반 출신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덕림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고종 21) 양호도찰(兩湖都察)에 임명되었다. 그 해 고부군에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에 항거하여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동학의 내부에서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무력을 통한 개혁을 주장하는 남접(南接)과 최시형을 중심으로 종교적 입장을 내세워 무력항쟁에 반대하는 북접(北接)으로 나뉘어 양분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오지영은 그 조정에 나서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 아래 남·북접을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905년 손병희(孫秉熙)가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한 이후 최고간부의 한 사람이 되어 총부(總部)에서 천도교의 기틀을 닦는 데 공헌하였으며,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인의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1920년 천도교 의사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천도교의 혁신운동을 통하여 진로를 모색하였으나 복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손병희의 사망 후에는 천도교의 주류에서 밀려나 천도교의 혁신파인 연합교회파(聯合敎會派)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만년에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와 경과 등을 생생히 서술한 《동학사(東學史)》를 집필하였다. 이 책에서 오지영은 농민군이 봉기하면서 요구한 ‘폐정개혁안’에는 탐관오리나 횡포한 부호 및 양반 처벌, 노비문서 소각 등이 포함돼 있다고 서술하였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실제로는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또한 이 책에서는 남접과 북접의 대립상황을 심각하게 묘사하였지만, 이것은 오지영이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하여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출처/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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