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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 최원숙 新溪 崔源肅Choi WonSuk

1854 ~ 1923

조선

작가약력

  • 1854(철종 5)∼1923. 조선 말기 효자·무신·교육자.

작가 소개

자는 형권(衡權)이고, 호는 신계(新溪)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경상남도 단성(丹城) 남산촌(南山村) 출신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 최사비(崔斯泌)의 후손이다. 고조는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 최대승(崔大升), 증조는 장사랑(將仕郞) 최규상(崔圭祥), 조부는 승사랑(承仕郞) 최병두(崔秉斗)이고, 부친 최진명(崔鎭明)과 부친의 둘째 부인 고성박씨(固城朴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박치규(朴致奎)이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거창신씨(居昌愼氏)이고, 둘째 부인은 김녕김씨(金寧金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부지런히 공부해 붓을 들어 글을 쓰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날이 밝으면 밭 갈고 물고기를 잡아서 부모에게 공양해 드렸으며 부모상을 연이어 당해 슬픔이 지나쳐 몸을 상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그를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1893년(고종 3)에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다음해 내홍(內訌)과 외란(外亂)을 겪으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1902년(광무 6)에 다시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除授)되자 늙고 능력이 없다는 핑계로 의원면직을 청하고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903년(광무 7)에 집 동쪽 2리되는 신안강(新安江) 가에 신계정사(新溪精舍)를 지어놓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1905년(광무 9)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리(義理)를 밝히고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에게 맹자의의(孟子疑義)를 편지로 질의하였으며, 1906년(광무 10)에는 곽종석이 신계정사를 방문하였다.
슬하에 거창신씨와의 사이에는 1남 1녀를 두었으며, 김녕김씨와의 사이에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최후림(崔厚林)과 최치림(崔致林)이고, 딸은 박진숙(朴鎭琡)·권사용(權思容)·이도재(李道載)에게 출가시켰다. 묘소는 단성 도산면(都山面) 다복동(多福洞)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유고 《신계집(新溪集)》은 6권 3책의 목활자본으로 권재규(權載奎)의 서문(序文)과 최명희(崔命熙)와 최후림(崔厚林)이 발문(跋文)을 붙여 1931년 간행되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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