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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쇼린 加藤 松林Kato Sholin
1898 ~ 1983
일본
동양화
작가약력
- 1898(메이지 31)~1983(쇼와 58). 근대 조선에서 주된 활동을한 화가.
작가 소개
가토 쇼린(加藤 松林)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일본인 화가 중에서 조선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사람 중의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도 조국 일본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경계인’이다.
그는 1898년 9월16일 도쿠시마(德島)의 나카군 구와노초(那賀郡 桑野町, 지금의 아난(阿南)시)에서 가토 야스조(加藤安三)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부강중학(富岡中学)을 거쳐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18년 20세 때 부친의 사업 관계로 경성으로 이주해 경성부 광희정(京城府 光熙町)에 살았다.
대학에서는 문학을 전공하여 미술과는 인연이 없었으나, 경성에 이주하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평생 화가의 삶을 살게 된다. 경성에 와서 가토 쇼린은 그림에 뜻을 두고 배우고자 하였으나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 그때 마침 경성에는 시미즈 토운(清水 東雲, 1869~1929)이라는 사람이 사진강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시미즈 토운은 1908년경에 서울에 들어와 이미 청소년들에게 회화와 사진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토 쇼린은 시미즈 토운이 경영하는 경성화실의 존재를 듣고 찾아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타고난 재주가 있었던 가토 쇼린은 시미즈 토운에게 동양화의 기본을 배우며 독자적인 자신의 미술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빠른 시간 안에 능력 있는 화가의 반열에 올라선 그는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출품하여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또한 심사를 하기 위해 방문한 당시의 미술계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풍경· 정물 분야에 독자적인 화풍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조선미술전람회는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때마침 나타난 출구였다. 제1회부터 마지막 제23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하여 상을 받고, 출품자로 시작하여 추천작가·심사위원에 이른 유일한 인물이 된다. 그는 착실히 실력을 쌓아 조선 화단의 부동의 지위를 갖추었으며, 조선왕실에서 그림을 강의하는 등 조선 미술계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조선에서 그림을 배워 조선에서 성공한 화가인 셈이다.
1938년에 대일본회화강습소에서 출판한 『대일본화가명감(大日本畵家名鑑)』의 기록에 보면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고 하며 산수와 화조에 모두 능하였다고 한다. 주소는 경성부 서사헌정(西四軒町) 193-19로 되어 있다. 서사헌정은 지금의 장충동이니, 가토 쇼린은 처음 경성에 와서 광희동에서 살다 장충동쪽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동경에서 발간된 화가 명감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때 쯤엔 일본 내에서도 화가로서의 경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반도 전국을 여행 다니며 풍경을 그리고,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팔도를 누비며 조선의 산수와 풍속을 화폭에 담아낸 그는 특히 금강산에 매료돼 수차례 산행을 통해 금강산의 사계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어느 쪽으로도 정치색을 띠지 않고 객관적으로 자연과 풍속을 담은 작품들이다. 한국인의 편에 서서 당시 일제 강점기 치하 민중들의 애환을 직접 담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일제의 식민정치를 찬양하는 작품들도 없다.
조선미술전람회 마지막까지 출품하며 정력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는 1945년 일본 패전과 함께 귀국하여 동경에서 생활한다. 그는 일본 중앙화단에서 활동하면서도 한국계 잡지에 집필하거나 조선학회 및 일한친화회 등의 활동에 참가했다. 가토 쇼린은 이후 오사카 인근으로 이주해 살게 되는데 계속하여 재일동포들과 활발히 교류를 했다. 교토(京都) 소재 민족학교인 국제학원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화가인 부인 역시 오사카의 민족학교인 금강학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재일사회와의 교류에 일생을 바쳤으며, 1958년에는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화문집 『조선의 아름다움』을 출간하기도 하였다.1 한일 국교회복 이전인 1963년에는 전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정부에 초대를 받아 한국을 방문하였다. 조선 서민들의 일상을 즐겨 그리며, 조선을 각별히 사랑했던 그는 1983년 오츠시(大津市)에서 84세로 타계했다.
유작으로 남아있는 그림들은 모두 300여점으로 부산에서 평양까지 한반도 전역을 돌며 그린 풍경화와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가 대부분이다. 유족들은 이 모두를 아난시(阿南市)에 기증했다. 그는 ‘남북 조선의 융화에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유지를 남길 만큼 조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1898년 9월16일 도쿠시마(德島)의 나카군 구와노초(那賀郡 桑野町, 지금의 아난(阿南)시)에서 가토 야스조(加藤安三)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부강중학(富岡中学)을 거쳐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18년 20세 때 부친의 사업 관계로 경성으로 이주해 경성부 광희정(京城府 光熙町)에 살았다.
대학에서는 문학을 전공하여 미술과는 인연이 없었으나, 경성에 이주하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평생 화가의 삶을 살게 된다. 경성에 와서 가토 쇼린은 그림에 뜻을 두고 배우고자 하였으나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 그때 마침 경성에는 시미즈 토운(清水 東雲, 1869~1929)이라는 사람이 사진강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시미즈 토운은 1908년경에 서울에 들어와 이미 청소년들에게 회화와 사진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토 쇼린은 시미즈 토운이 경영하는 경성화실의 존재를 듣고 찾아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타고난 재주가 있었던 가토 쇼린은 시미즈 토운에게 동양화의 기본을 배우며 독자적인 자신의 미술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빠른 시간 안에 능력 있는 화가의 반열에 올라선 그는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출품하여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또한 심사를 하기 위해 방문한 당시의 미술계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풍경· 정물 분야에 독자적인 화풍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조선미술전람회는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때마침 나타난 출구였다. 제1회부터 마지막 제23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하여 상을 받고, 출품자로 시작하여 추천작가·심사위원에 이른 유일한 인물이 된다. 그는 착실히 실력을 쌓아 조선 화단의 부동의 지위를 갖추었으며, 조선왕실에서 그림을 강의하는 등 조선 미술계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조선에서 그림을 배워 조선에서 성공한 화가인 셈이다.
1938년에 대일본회화강습소에서 출판한 『대일본화가명감(大日本畵家名鑑)』의 기록에 보면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고 하며 산수와 화조에 모두 능하였다고 한다. 주소는 경성부 서사헌정(西四軒町) 193-19로 되어 있다. 서사헌정은 지금의 장충동이니, 가토 쇼린은 처음 경성에 와서 광희동에서 살다 장충동쪽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동경에서 발간된 화가 명감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때 쯤엔 일본 내에서도 화가로서의 경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반도 전국을 여행 다니며 풍경을 그리고,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팔도를 누비며 조선의 산수와 풍속을 화폭에 담아낸 그는 특히 금강산에 매료돼 수차례 산행을 통해 금강산의 사계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어느 쪽으로도 정치색을 띠지 않고 객관적으로 자연과 풍속을 담은 작품들이다. 한국인의 편에 서서 당시 일제 강점기 치하 민중들의 애환을 직접 담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일제의 식민정치를 찬양하는 작품들도 없다.
조선미술전람회 마지막까지 출품하며 정력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는 1945년 일본 패전과 함께 귀국하여 동경에서 생활한다. 그는 일본 중앙화단에서 활동하면서도 한국계 잡지에 집필하거나 조선학회 및 일한친화회 등의 활동에 참가했다. 가토 쇼린은 이후 오사카 인근으로 이주해 살게 되는데 계속하여 재일동포들과 활발히 교류를 했다. 교토(京都) 소재 민족학교인 국제학원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화가인 부인 역시 오사카의 민족학교인 금강학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재일사회와의 교류에 일생을 바쳤으며, 1958년에는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화문집 『조선의 아름다움』을 출간하기도 하였다.1 한일 국교회복 이전인 1963년에는 전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정부에 초대를 받아 한국을 방문하였다. 조선 서민들의 일상을 즐겨 그리며, 조선을 각별히 사랑했던 그는 1983년 오츠시(大津市)에서 84세로 타계했다.
유작으로 남아있는 그림들은 모두 300여점으로 부산에서 평양까지 한반도 전역을 돌며 그린 풍경화와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가 대부분이다. 유족들은 이 모두를 아난시(阿南市)에 기증했다. 그는 ‘남북 조선의 융화에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유지를 남길 만큼 조선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출처/스마트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