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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산 성수 스님 活山 性壽SeongSu Buddhist Monk

1923 ~ 2012

한국

작가약력

  • 1923~2012. 승려.

작가 소개

성수 스님은 1923년 음년 2월 2일 경남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상작마을에서 아버지 이은영(李殷榮)공 어머니 정모심화 여사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1년 출가의 뜻을 품고 이 산 저 산으로 도인을 찾아다니다 범어사에 발길이 머물게 되었다. 법당 앞에서 “큰 중 나와라. 새끼 중은 가고 큰 중 나와라”고 큰소리를 내지르며 소란을 피웠다. “1년 동안 원효대사 같은 도인을 찾아다녔으나 보이지를 않고 절간에는 한가한 중들뿐이니 불교가 백년을 못 갈 것이요, 그로인해 나라도 위태롭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 나를 이해시키시오. 그러지 못하면 지금 당장 범어사를 불 지르겠소.” 이 때가 스님 나이 19살. 당찬 기개를 보인 그가 나중에 범어사의 주지가 된다. 1944년 양산 내원사에서 성암 스님(1889~1950)을 만나 출가 득도했다. 성수 스님은 성암 스님을 따라 정선 갈래사(현 정암사)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원효 스님 토굴 터에 움막을 짓고 홀로 정진했다. 그러다 1945년 8·15광복소식을 듣고 내원사로 왔다. 은사 성암 스님은 스님에게 해인사로 가서 공부할 것을 권했다.
당시 해인사는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해인총림이 설립되어 서옹 스님이 입승을, 청담ㆍ구산ㆍ인곡 스님 등이 정진하고 있었다. 해인사에서 안거한 스님은 1948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아 지녔다. 이 해에 스님은 성철ㆍ청담 스님 등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에 참여, 3개월간 수행했다. 1967년 조계사 주지에 취임했다. 1968년 범어사 주지를 맡아 중창불사에 크게 기여했다. 1969년 스님은 경봉 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고 건당했다.
1972년 스님 나이 50세 법랍 29세에 해인사 주지가 되고 이듬해 서울 법수선원을 개원했다. 1976년 의성 고운사 주지, 1978년 종단의 비상대책위 총무원장. 일본에서 열린 세계불교지도자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 1981년 조계종 18대 총무원장. 취임식에서 스님은 “우리불교가 불사에 치우치고 있는데 무엇보다 인재불사가 중요하다. 사람 있는 곳에 절도 있고 재원도 있게 마련”이라며 인재양성의 중요성 강조. 1986년 백암에 오도선원을 개원하고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을 설립했다.
1988년 함양에 황대선원을 개원하고 시민선방도 열었다. 1989년 연꽃마을 초대 이사장 취임. 1994년 조계종 원로의원, 2002년 산청 황석산 해동선원을 개원, ‘선불장(選佛場)’이란 글을 입구에 새겨놓고 원로 스님의 사상을 계승하는 도량으로 법을 펼쳤다. “원효대사는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고 남는 것은 평생에 지은 업보라 했다. 1초도 늦추지 말고 지금 이 순간부터 자기를 고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 새끼사자를 기다리느라 늙어도 늙은 척도 안하고 살아. 누군가 있어 황석산 괴짜 중의 보따리를 걷어찬다면 그를 끌어안고 한바탕 덩실덩실 춤을 출거야.” 이때가 스님 나이 80세, 인재양성의 원력을 놓치지 않았다.
2004년 대종사 법계 품수, 2006년 조계종 전계대화상으로 추대,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됐다. 2012년 4월15일 오전6시 함양 황대선원에서 입적했다. 법랍 69세, 세수 90세.
출처/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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