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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곡 고희동 春谷 高羲東Ko HuiDong

1886 ~ 1965

근대·현대

한국화·서양화

작가약력

  • 학력
  • 1915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 기관 경력
  • 1903년-1905년 궁내부 광학국 주사
  • 1905년-1911년 구한국 궁내부 관리
  • 1911년 도일
  • 1918년 서화협회 창립, 총무, 회장
  • 1920년-1922년 동아일보 기자
  • 1945년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 역임
  • 1945년 조선미술협회 회장
  •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 1948년 한민당 상임위원
  • 1949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
  •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
  • 1949년-1959년 제1-8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 1952년 국민당 상임위원
  • 1954년 대한미술협회,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 1957년 홍익대학교 명예교수
  • 1960년 참의원 초대 의원(민주)
  • 휘문고보 보성고보, 중동고보 교사
  • 전시
  • 1915년, 공진회전
  • 1922년, 1924년, 조선 미술전람회전
  • 1936년, 제15회 서화미술협회전
  • 1949년-1960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전, 경복궁 미술관
  • 1957년, 개인전, 중앙공보관
  • 1997년, 교과서 미술전, 예술의전당
  • 1998년, 정부 소장 미술품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8년, 한국 근대 미술: 수묵, 채색화-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 2000년, 고려대학교 개교 95주년 기념 2000년에 보는 20세기 한국미술 200선전, 고려대학교 박물관
  • 2005년, 춘곡 고희동 40주기 특별전, 서울대학교 박물관
  • 10명가 산수 풍경화전 조선 미술관
  • 동양 미술전,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미술관
  • 한국 현대 미술전,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
  • 수상
  • 1922년, 조선 미술전람회 입선
  • 1948년, 제1회 서울시 문화상
  • 1955년, 1959년, 제2, 6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작가 소개

본관은 제주. 호는 춘곡(春谷). 서울 출생. 대한제국 말기에 군수를 지낸 영철(永喆)의 셋째 아들이다.
14세 때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 궁내부 주사로 취직하여 궁중 내의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 이 무렵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리 생활을 버리고 현실 도피책으로 그림을 시작하였다.
당대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당시 화단은 중국의 화보(畫譜)를 충실히 임모(臨模)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환멸을 느낀 그는 궁내부 시절 외국인들과 접촉으로 대할 수 있었던 서양의 그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양화과(洋畫科)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에 들어갔다. 이것이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서양화 제작이 되었다.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귀국하자 그는 신(新)미술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다.
1918년 당시 서화계의 중진과 대가들을 종용하여 최초의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이자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書畫協會)를 결성하였다(초대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
서화협회의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회원 작품전으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이 열렸다.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근대적인 전시회였다. 회원전과 더불어 계몽 사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지인 『서화협회보(書畫協會報)』를 창간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에서」라는 제목의 유화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회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 그 뒤 줄곧 서화협회만을 이끌었다.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서화협회가 해산되기까지 총무 또는 회장으로 민족진영의 미술가 단합에 정력을 기울였다. 광복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우익 미술가들의 집결체인 조선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오랫동안 심사 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을 전후하여 한국 민주당에 가입,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하자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로서, 그리고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미술 행정가로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 후 1920년대 중반에 동양화로 전향, 복고적 산수화를 다수 제작했다. 고희동의 산수화들은 동양화를 기반으로 서양화의 기법과 시각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양화적인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원근감과 깊이감 없는 동양화의 공간표현에 서양화적인 효과를 넣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생경한 효과를 내는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화면의 공간처리는 전통적인 기법을 충실히 따르나, 바위, 나무의 묘사는 서양화적 색채와 명암법을 적용했다. 그러나 양식적으로는 독자성을 이루지 못하여 독립된 화가로서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현대미술관, 월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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