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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남 민병석 詩南 閔丙奭Min ByeongSeok

1858 ~ 1940

조선

작가약력

  • 1858(철종 9)∼1940. 문관·고위관료·정치가.

작가 소개

1858년 12월 12일 충청도 회덕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소(景召), 호는 시남(詩南)·의재(毅齊)이다. 민관식(閔觀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예조판서를 지낸 민영위(閔泳緯)의 아들 양손자로 입양되었다. 조선 말기에 동부승지, 이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농상공부대신, 군부대신, 철도원 총재, 헌병대 사령관, 궁내부대신 등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장관,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부회장, 조선사편수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경술국적(庚戌國賊)’으로 지탄을 받았으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암으로 투병하다 1940년 8월 6일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1879년 2월 문과에 합격해서 1880년 5월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1881년 3월 규장각 직각, 1882년 5월 승정원 동부승지, 10월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884년 8월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9월 성균관 대사성에 등용되었다. 1885년 1월 승정원 도승지, 2월 호조참판, 3월 도승지, 6월 협판내무부사로 전임되었고 농무국(農務局)을 관장했다. 8월에는 이조참판과 시강원겸보덕을 지냈다.
1886년 2월 한성부좌윤이 되었다가 3월 한성부우윤으로 명받았다. 1888년 10월 예조참판, 1889년 3월 강화부 유수 겸 육영공원 판리(辦理), 4월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1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91년 5월 광무회판(鑛務會辦)을 겸하여 평안도 내 광산을 관장했다.
1894년 청일전쟁 중 평양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와 결탁했다가 일본군이 평양성을 점령하자 도주했다. 1894년 12월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1895년 6월 풀려났다. 1895년 10월 시책문서사관(諡冊文書寫官)으로 복귀되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직후 궁내부 특진관 겸 산릉제거(山陵提擧), 7월 경연원 시강관, 산릉제조, 빈전제조(殯殿提調), 시종원경(侍從院卿)을 역임했다. 1897년 7월 의정부 참찬(?贊), 10월 홍문관 학사를 거쳤다.
1898년 10월 의정부 찬정(贊政)으로 농상공부대신과 궁내부대신, 12월에 육군부장과 군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습격해서 해산시킨 배후로 지목되었다. 1899년 4월 학부대신에 임명되었고 5월부터 8월까지 궁내부대신 임시서리도 겸직했다. 같은 해 8월부터 12월까지 내부대신으로 전임했다. 1899년 1월 대한천일은행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같은 해 3월부터 1902년 3월까지 은행장을 역임했다.
1900년 2월 농상공부대신으로 재입각하여 4월 철도원 총재, 8월 헌병대 사령관, 9월 원수부 검사국 총장을 겸했다. 같은 해 10월 군부대신 겸 탁지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01년 10월 혜민원 총재를 맡았다. 1901년 2등 팔괘장에 서훈되었다. 1902년 2월 철도원 총재가 되어 경부선 철도부설을 지휘했고 4월 표훈원(表勳院) 부총재, 12월 수륜원(水輪院) 총재를 겸했다. 행서에 뛰어난 서도가로 1902년 고종 즉위 40년 기념비 설립을 발의하고 명문을 썼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궁내부대신으로서 1904년 3월 방문한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영접하는 행사를 지휘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건넨 30만 엔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그해 5월 그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장을 받았다. 궁내부대신으로 같은 해 5월 어공원경(御供院卿)과 8월 장례원경(掌禮院卿), 9월 시종원경을 겸임했다.
1905년 1월 표훈원 총재에 임명된 후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를 왕실고문으로 초빙하라면서 추진비 10만 엔을 주었다. 같은 해 7월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 초빙운동을 벌이다 실패하고 9월에 귀국했다. 성과를 이루지 못한 죄로 3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10월에 바로 사면되고 같은 달에 육군부장으로 재임용되었다. 1906년 7월 내부대신, 시종원경, 제도국 총재를 겸임했고 제실재정회의(帝室財政會議) 의원을 역임했다.
1907년 4월 비서감경, 8월 군법회의 판사, 10월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를 겸임했다. 같은 해인 1907년 2월 이토 히로부미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3월에 평의원, 1908년 5월에는 고문으로 활동했다. 1907년 3월 대동문우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08년 6월 궁내부대신으로 재임용되어 1910년 8월 국권을 강탈당할 때까지 재임했다. 1908년 8월 기호흥학회 찬무원(贊務員)으로 활동했다. 9월에는 일본에서 조선과 타이완의 식민지화를 촉진하기 위해 결성된 동양협회에 100원을 기부했다. 10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으로 위촉되었다.
1909년 2월 일본으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 통감유임운동을 벌였고 3월에는 일본 정부가 주는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내각회의에서 군부폐지를 의결했다. 1909년 11월 도쿄에서 열리는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맞춰 장충단에서 관민추도회 시행을 발의하고, 그 자신은 순종의 칙사로 장례식에 참석하여 친서를 전달했다. 12월 14일에는 일본적십자사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기념추도회에 참석했다. 1910년 2월 대동교회 찬교(贊敎)로 위촉되었고 4월에는 합병 찬성 추진단체인 정우회(政友會)에 금화 200환을 후원했다. 궁내부대신으로서 1910년 6월 한국의 경찰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한국경찰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 체결과 8월 ‘합병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 참석해 이를 가결시킴으로서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2월 조선귀족의 실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명농회(明農會)를 조직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10만원을 받았다. 1911년 2월부터 1919년 10월까지 이왕직의 장관(칙임관) 겸 직원징계위원으로 임명되어 매년 3,000∼3,500원 수당을 받았다. 이왕직장관으로 순종을 대리해 일본천황·황실·정부의 경조사를 챙기고 신사와 신궁의 각종 제례에 참석했다. 1911년 3월 사립 오성(五星)학교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 찬성원과 1912년 1월 이문회(以文會)에 참여했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9월 메이지[明治] 천황의 장례식에 의친왕 이강(李堈)을 수행했다.
1913년 3월 경성유치원 설립에 동참했고, 5월 조선귀족을 위한 식림(植林)사업을 하는 보식원(普植園) 창립총회에 참석해 상의원장에 위촉되었다. 7월에는 조선무역회사 찬성인으로 주식모집에 나섰다. 1915년 5월 조선총독부의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유공회원으로 250원을 기부했고, 8월 가정박람회(家庭博覽會) 명예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주는 유공장(有功章)과 11월 처 심경섭(沈卿燮)과 함께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6월 순종이 천황을 보러 일본으로 갈 때 배종했다. 1918년 4월 당시 조선문예사 사장으로 재임했다. 8월 경성구제회에 500원을 기부했고 11월에 서화협회 고문을 맡았다.
1919년 1월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황실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혼인을 환영하는 글을 발표했다.(『반도시론』1919.2.) 1920년 6월 해동은행 취체역을 맡았고, 그해 10월 사립 피병원(避病院) 설립기성회에 참여하여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2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위원에 위촉되었다. 1921년 6월 고려요업주식회사를 설립해 대표로 취임했고, 그해 10월부터 1934년 5월까지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사장과 고문을 역임했다.
1922년 조선개조를 주장하는 조선협회 고문, 1923년 4월 조선제사주식회사 사장, 10월 교육실천회 특별회원, 1924년 11월 계림전기주식회사 발기인과 창립위원장을 역임했다. 1925년 5월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했다. 그해 7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1939년 10월까지 15년간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6년 10월부터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고문을 맡았다. 1927년 1월 이왕직장관 민영기가 사망해서 공석이 된 장관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여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1928년 2월부터 1939년까지 조선귀족세습재산심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발기해 평의원이 되었으며 9월에는 고문으로 100원을 기부했다. 같은 해 10월 남선육도연합축산공진회(南鮮六道聯合畜産共進會) 고문, 11월에는 처와 함께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설립한 창복회(昌福會) 감사, 12월 조선축산협회 조합장을 맡았다.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 1931년 2월 모성공회(慕聖公會) 고문, 11월 단군신전봉찬회(檀君神殿奉讚會) 고문, 1932년 7월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 11월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 발기인을 맡았다.
1933년 2월 당시 30만원 이상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였다. 같은 해 5월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소유지의 소작인 30명의 소작권을 박탈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1934년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朝鮮國防義會聯合會) 고문, 1935년 2월 조선유교회의 기관지 일월시보사의 경학부 고문, 10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과 은배(銀杯)를 받았다.
1937년 8월 중일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에 처 심경섭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간사로 활동했다. 1937년 10월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전시 식민지교육정책을 심의·결정하는데 참여했다. 1937년 11월 조선신문사 상담역, 1938년 9월 조선총후보국회(朝鮮銃後報國會) 발기인,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고문과 동양의약협회 고문, 7월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10월에는 중추원 고문에서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1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부회장, 12월 왕공족(王公族)심의회 심의관과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맡았다.
서예작품으로 광화문에 있는 고종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와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는 고구려 동명왕릉비(東明王陵碑)가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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