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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미 민영익 芸楣 閔泳翊Min YeongIk

1860 ~ 1914

조선

서화

작가약력

  • 1860∼1914. 근대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인화가.

작가 소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 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 원정(園丁), 천심죽재(千尋竹齋) 등이 있다. 아버지는 민태호(閔台鎬), 어머지는 송씨(宋氏)이다.
1875년(고종 12)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와 그의 아들이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되어,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이른바 ‘죽동궁(竹洞宮) 주인’이 되었다. 1877년 문과에 급제, 이조 참의ㆍ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1881)ㆍ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識沿司堂上) 협판통리아문사무(協辦統理衙門事務)를 역임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난군에게 집을 파괴당했고, 난이 수습된 뒤 사죄사절(謝罪使節)로 일본에 다녀왔다. 권지협판 교섭통상사무(權知協辦交涉通商事務)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海關事務)를 교섭했으나, 1883년 전권 대신으로 도미(渡美), 국서 (國書)를 전달한 뒤 한국 최초로 서양 문화를 시찰하고 귀국했다. 갑신정변(1883) 때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 했었고,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ㆍ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밀파한 일도 있다. 1885년 지리국(地理局) 군무국(軍務局)의 총판ㆍ한성부 판윤ㆍ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1886년 정부의 친로 거청(親露拒淸) 정책에 반대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이를 밀보했다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지자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 뒤, 귀국하여 1889년 판의금 부사(判義禁府事)ㆍ1898년 찬정(賛政)이 되었으나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다시 홍콩,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서 그 곳에서 사망한다.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부친 민태호(閔台鎬)와 숙부 민규호(閔奎鎬)의 가학을 이어 15세 무렵 서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1878년 왕실 외척으로 정계에 입문했던 초기에 김정희 제자인 허련(許鍊)을 자택에 머물게 하는 등 서화가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추사파와의 직간접인 인연은 개화파와의 대립으로 상해에 정착했을 때, 그가 오창석(吳昌碩), 포화(蒲華), 서친주(徐親周), 고옹(高邕) 등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문인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주요 기반이 되었다. 그는 1904년 상해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오창석이 1895년 8월 새겨준 ‘천심죽재(千尋竹齋)’라는 인장의 변관에 “운미 선생이 기거하는 곳을 천심죽재라 하였다”라는 구절과 1895년 이후의 작품부터 오창석의 인장이나 포화의 제시가 다수 포함되고 있어 1895년 무렵 천심죽재에 정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상해 서화가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독자적인 운미란(芸楣蘭)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비수(肥瘦)와 삼전(三轉)이 없는 난엽(蘭葉)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리다 끝이 뭉툭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화풍은 이하응(李昰應)의 석파란(石坡蘭)과 함께 조선미술전람회를 포함한 근대 한국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1898년과 1909년 민영익을 방문해 상해의 서화가들과 직접 교유한 서병오(徐丙五)가 운미란과 포화의 묵죽화풍을 수용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서동균(徐東均), 김용진(金容鎭), 배효원(裵孝源), 이경배(李慶培) 등이 운미란을 즐겨 그렸으며, 김규진(金圭鎭) 제자인 이병직(李秉直)과 이응노(李應魯)도 일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포화의 영향을 받아 죽엽(竹葉)이 아래로 처지는 수하식(垂下式)의 우죽(雨竹)과 노죽(露竹)을 그렸는데, 이는 노근란(露根蘭)과 함께 망명 생활을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 것이다. 특히 그의 운미란은 근대 한국 화단에서 석파란과 함께 널리 유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까지도 지속되고 있어 현대 사군자의 양식적 연원이나 계보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김규진, 서병오 등 한국 서화가들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오창석, 포화 등 상해 화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양국의 회화 교류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다.
현전 작품에는 「묵란」(1904, 간송미술관)과 「노근묵란(露根墨蘭)」(삼성미술관 리움)이 대표적이며 다수의 사군자가 전하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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