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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궁 박성환 長弓 朴成煥Park SoungHwan
1919 ~ 2001
한국
서양화
작가약력
- 학력
- 1938년 도쿄문화학원 미술학부 졸업
- 1942년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 서양화 수학
- 기관 경력
- 1944년 일본 이과전 초대작가
- 1946년 해주 미술학교 창설
- 1951년 종군화가
- 1952년 대한미술협회 회원
-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교 미술대학 창설취임교수
- 1959년-197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 1964년 목우회 공모전 심사위원
- 1967년-1970년 한국미술협회 서양화 이사
- 1968년 제1회 동아국제미술전 서양화부 초대작가
- 1975년 일본 동경오원회 회원
- 1976년 한국오원미술회 회장, 심사위원
- 1980년 한독미술협회 회원
- 전시
- 1937년, 선만 중등 미술전, 서울
- 1944년, 이과회 미술전, 동경
- 1944년-1999년, 개인전 (30회)
- 1950년, 월남작가 3인전, 대구 공보관
- 1954년, 6.25 기념 미술전, 경복궁 미술관
- 1959년, 미국 독립기념 뉴욕전, 뉴욕
- 1959년-1974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전, 경복궁 미술관
- 1960년, 동남아미술전, 동남아
- ...
- 1992년, 한국 근대미술 명품전, 호암갤러리
- 1992년-1993년, 원로작가 회화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4년,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1주년 기념전
- 1994년, 음악과 무용의 미술전, 예술의전당
- 1994년, 서울 풍경의 변천전, 예술의전당
- 1994년, 신춘 서양화 초대전, 서울신문사
- 1997년-1998년, 한국 H. M. A 국제 교류전, 롯데 화랑
- 1999년-2000년, 원로작가 초대전, 서울 시립미술관
- 1999년, 한국미술: 인간, 자연, 사물, 국립현대미술관
- 1999년-2000년, 움직이는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 등 전시
- 수상
- 1936년, 제1회 조선일보사 주최 전국학생미술전 특선 최고상
- 1937년, 조선 미술전람회 입선
- 1937년, 제1회 북조선미술전람회 1등 최고상
- 1941년-1943년, 일본 미과전 입선
- 1954년, 6.25기념 미술전 국방부장관상
- 1980년, 제5회 한국미술문화대상 대상
- 1996년, 일본문화진흥회 국제예술문화상
작가 소개
191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1938년 일본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 양화부에 입학하였다. 1942년에는 일본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를 수료하였다. 1947년 월남하였으며, 아들 수영과 수인을 두었다.
1947년 황해도에 해주미술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해 제1차 국가미술전람회에 「간척지」를 출품하였다. 그러나 작품 속 인민이 노예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작품이 철수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심사위원 선우담(鮮于澹, 1904∼1984)이 해임 당하였다. 박성환은 1947년 월남하였으며, 육군본부 정경실에 소속되어 좌익미술인을 우익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하였다. 1948년 민족회화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1950년에는 50년 미술협회 추천회원이 되었다. 1951년에는 국방부 종군화가단 단원이 되었다. 대한미술협회 중앙위원 및 전국예총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창설교수로 취임하였다. 1959년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7년에는 구상전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박성환의 작품은 황소나 한국인 등 향토색 짙은 소재를 주로 하여 다채로운 필치로 묘사되고 있다. 작가가 좋아하는 주제는 농악, 군무, 풍경, 항아리를 든 여인 등인데, 그는 이러한 주제로 한국의 목가적인 풍경을 추구하였다. 박성환의 작품세계는 색채와 형태의 단순화로서 어느 쪽이냐 하면 주관성이 강한 표현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는 화면에서 색채의 대비, 농도를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톤(Tone)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또 기술상에서는 화면의 층(層)을 중요시해서 마치 ‘루오’나 ‘박수근’의 작품과 같이 중복된 화면을 형성한다. 그러한 기교를 쓰면서도 그의 작품이 획일적인 경지를 벗어나고 있는 것은 그의 내부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정신의 다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는 농악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 주를 이루는데, 해체된 형태와 자유로운 구성 등으로 인물의 운동성이 강조되어 있다.
1936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제1회 전국학생미술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였으며,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계류(溪流)」로 입선하였다. 같은 해 선만(鮮滿)중등미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1941년과 1942년 이과전에 입선하였으며, 1943년에는 초대작가로 이과전에 참여하였다. 1946년 전국도 단위로 개별 개최된 제1회 해방기념 종합전람회의 평양전람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1954년에는 국방부와 미술협회가 주최하는 6.25기념미술전에서 「6월 27일」로 국방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상하였다.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상하였다.
1947년 황해도에 해주미술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해 제1차 국가미술전람회에 「간척지」를 출품하였다. 그러나 작품 속 인민이 노예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작품이 철수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심사위원 선우담(鮮于澹, 1904∼1984)이 해임 당하였다. 박성환은 1947년 월남하였으며, 육군본부 정경실에 소속되어 좌익미술인을 우익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하였다. 1948년 민족회화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1950년에는 50년 미술협회 추천회원이 되었다. 1951년에는 국방부 종군화가단 단원이 되었다. 대한미술협회 중앙위원 및 전국예총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창설교수로 취임하였다. 1959년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7년에는 구상전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박성환의 작품은 황소나 한국인 등 향토색 짙은 소재를 주로 하여 다채로운 필치로 묘사되고 있다. 작가가 좋아하는 주제는 농악, 군무, 풍경, 항아리를 든 여인 등인데, 그는 이러한 주제로 한국의 목가적인 풍경을 추구하였다. 박성환의 작품세계는 색채와 형태의 단순화로서 어느 쪽이냐 하면 주관성이 강한 표현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는 화면에서 색채의 대비, 농도를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톤(Tone)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또 기술상에서는 화면의 층(層)을 중요시해서 마치 ‘루오’나 ‘박수근’의 작품과 같이 중복된 화면을 형성한다. 그러한 기교를 쓰면서도 그의 작품이 획일적인 경지를 벗어나고 있는 것은 그의 내부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정신의 다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는 농악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 주를 이루는데, 해체된 형태와 자유로운 구성 등으로 인물의 운동성이 강조되어 있다.
1936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제1회 전국학생미술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였으며,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계류(溪流)」로 입선하였다. 같은 해 선만(鮮滿)중등미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1941년과 1942년 이과전에 입선하였으며, 1943년에는 초대작가로 이과전에 참여하였다. 1946년 전국도 단위로 개별 개최된 제1회 해방기념 종합전람회의 평양전람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1954년에는 국방부와 미술협회가 주최하는 6.25기념미술전에서 「6월 27일」로 국방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상하였다.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상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월간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