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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현거사 박영효 玄玄居士 朴泳孝Park YeongHyo
1861 ~ 1939
조선·근대
작가약력
- 1861(철종 12)∼1939. 고위관료·정치가.
작가 소개
1861년 6월 12일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필명은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그의 부친은 진사 출신인 박원양(朴元陽)이며 초명은 무량(無量)이었다. 12세 때 박규수(朴珪壽)의 천거로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금릉위(錦陵尉)의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영혜옹주가 결혼 석달이 채 되지못해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소실(小室)을 맞아들였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1879년 혜민서(惠民署) 제조, 1881년 의금부(義禁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되었다.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82년 한성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박규수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했다. 유교사상을 부정하고 평등과 민권사상 등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급진적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는 수신사(修信使) 대표에 임명되어 민영익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다. 도로를 관장하는 치도국(治道局),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경순국(警巡局), 신문발행을 담당하는 박문국(博文局) 등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민태호(閔台鎬) 등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았으며 민씨 척족과 김병시(金炳始) ·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 세력이 집권하자 그와 개화파는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도미(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박영효는 일본의 힘을 빌어 정계에 복귀하였지만 이후 일본에 역이용 되었다.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8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 약 13년간의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侯爵)을 받았으며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1882)이 있다.
박규수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했다. 유교사상을 부정하고 평등과 민권사상 등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급진적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는 수신사(修信使) 대표에 임명되어 민영익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다. 도로를 관장하는 치도국(治道局),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경순국(警巡局), 신문발행을 담당하는 박문국(博文局) 등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민태호(閔台鎬) 등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았으며 민씨 척족과 김병시(金炳始) ·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 세력이 집권하자 그와 개화파는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도미(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박영효는 일본의 힘을 빌어 정계에 복귀하였지만 이후 일본에 역이용 되었다.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8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 약 13년간의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侯爵)을 받았으며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1882)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