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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白南準Paik NamJune
1932 ~ 2006
한국
비디오아트·설치미술·행위예술
작가약력
- 학력
- 일본 도쿄대학교 미술사학 학사
- 미국 프랫대학 명예미술학 박사
- 독일 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 수학
- 기관 경력
- 1978년 뒤셀도르프 주립 예술아카데미 강사
- 1987년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
- 1989년 중앙일보 밀레니엄위원회 자문
- 1998년 9월-2006년 중앙일보 밀레니엄위원회 자문
- 1999년 4월-2006년 대통령자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
- 1999년 9월-2006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원 석좌교수
- 전시
- 1958년-1963년, 존 케이지와 만남
- 1959년, 제1회 퍼포먼스: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 뒤셀도르프 갤러리22
- 1960년, (퍼포먼스)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 퀼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아틀리에
- 1962년, (퍼포먼스) 음악의 네오 다다:바이올린 독주, 뒤셀도르프 카마슈필레
- 1962년, 높은 탑을 위한 음악과 무관객, 파리 에펠탑
- 1963년-1988년, 비디오 작업, 런던 헤이워드갤러리
- 1963년, 제1회 개인전: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부퍼탈 파르나스화랑
- 1965년, 최초의 비디오 설치 작업, 뉴욕 보니노화랑
- 1965년, 성인을 위한 첼로 소나타 No.1 (무어맨과 함께 초연), 미국
- ...
- 2000년 1월 12일-18일, 미와 질서-제1부 한국 현대미술의 탄생 주역들, 노화랑
- 2000년 2월 11일-4월 26일 특별전-백남준의 세계, 뉴욕 솔로몬 구겜하임미술관
- 2000년 2월 18일-3월 5일, 새천년의 지평전, 갤러리현대
- 2000년 6월, 백남준작품 40년회고전, 캘리포니아주 북서부 샌타바버라박물관
- 2000년 7월 21일-10월 29일, 백남준의 세계전, 호암갤러리, 로댕갤러리
- 2000년, 새천년의 항로:주요 국제전 출품 작가들, 1990-99, 국립현대미술관
- 2001년 4월 6일-21일, 세기를 넘어서 박영덕화랑
- 2002년 2월 22일-3월 3일, 제2회 한국현대미술제, 예술의전당미술관
- 2002년 7월16일-30일 백남준 드로잉전, 서울옥션 청담점
- 2003년 12월 5일-2004년 1월 11일, 백남준 드로잉전, 갤러리마노
- 2003년 12월 5일-2004년 1월 11일, 백남준 드로잉전, 갤러리마노
- 2004년 11월 1일-30일, 백남준 특별전, 한스갤러리
- 2005년 1월 20일-2월 15일, 백남준전, 갤러리신라
- 2005년 6월 24일-7월 31일, 한-일현대미술전, 가나아트센터
- 2005년 7월 6일-7월 30일, New Paintings of Masters전, 박영덕화랑
- 등 전시
- 수상
-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 1995년,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 1996년, 호암상
- 1998년, 쿄토상
- 미국 뉴욕주지사 예술상
- ...
- 1997년 9월 18일, 괴테메달, 괴테하우스
- 1998년 11월, 98년도 교토상
- 2000년 10월 16일, 금관문화훈장
- 2001년 1월, 제8회 빌헬름 렘브루크상, 독일 두이스부르크시
- 등 수상
작가 소개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섬유업 경영자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에서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작곡을 공부했으며, 졸업논문으로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에 대한 논문을 썼다.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와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 쾰른대학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했다.
1958년 백남준은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자신의 인생과 예술세계에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 이듬해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 Homage a John Cage’를 초연하며, 공연 중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수는 해프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평생의 예술적 동지인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60년에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 Etude for Pianoforte’를 발표했는데,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냈으며, 머리를 샴푸시키는 격렬한 행동주의 양식을 전개했다.
1961년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와 첫 만남을 갖고 플럭서스(Fluxus)의 창립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되었으며, 이후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독일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같은 해 스톡홀름에서 액션뮤직 프로그램으로 ‘심플 Simple’ 퍼포먼스 초연, 쾰른에서 ‘머리를 위한 참선 Zen for Head’, ‘플라토니크 3번 습작 Etude Platonique No.3’ 등을 공연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TV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에서 텔레비전 13대와 피아노 3대, 소음기 등을 배치하고, 이 가운데 피아노 1대가 요제프 보이스에 의해 파괴되는 퍼포먼스를 시행했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비디오 아트의 선구적 활동을 전개한 백남준은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Sharlotte Mooreman)과 함께 음악,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Opera Sextronique》(1967)에서는 무어만이 상의를 드러낸 채 첼로 연주를 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백남준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작업을 했다. 1973년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에서는 존 케이지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작품을 활용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은 예술 창작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1974년 《TV 정원 TV Garden》은 수많은 모니터의 사용을 통해 비디오 설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치 미술의 가능성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백남준은 1979년부터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며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82년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그의 첫 회고전이 열렸고, 1984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 Orwell》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1986년 제2편 《바이 바이 키플링 Bye Bye Kipling》, 1988년 제3편 《손에 손 잡고 Wrap around the World》를 연달아 발표했다.
그는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러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도시와 영상전(서울시립미술관, 1996), 교과서 미술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독일 비디오 조각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97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개인전(미국 국립미국미술관,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한국현대미술전-시간(호암갤러리, 1998)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백남준은 1996년 10월 독일 『포쿠스 Focus』지의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 월간지 『캐피탈 Capital』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올랐고, 같은 해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문화원(괴테 인스티튜트)이 비독일 국민에게 주는 ‘괴테메달’을 받았다. 또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98 교토상’을 수상했으며, 이어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서울의 로댕갤러리,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전 The Worlds of NamJune Paik’이 열렸다. 플럭서스에서 비디오 아트, 이후 레이저 아트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찾아 변혁을 꿈꿔 온 예술 탐험가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한국시각 1월 30일) 미국 플로리다주(州) 마이애미 자택에서 7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으며, 2008년 10월 경기도 용인시에 백남준 아트센터가 공식 개관했다.
그 밖의 주요 작품에는 《비디오 신시사이저 Video Synthesizer》(1969), 《TV 부처 TV-Buddha》(1974),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Moon Is the Oldest TV》(1975), 《다다익선 The more the better》(1988), 《전자 초고속도로: 미국 대륙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1995), 《엄마 Ommah》(2005) 등이 있다.
1958년 백남준은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자신의 인생과 예술세계에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 이듬해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 Homage a John Cage’를 초연하며, 공연 중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수는 해프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평생의 예술적 동지인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60년에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 Etude for Pianoforte’를 발표했는데,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냈으며, 머리를 샴푸시키는 격렬한 행동주의 양식을 전개했다.
1961년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와 첫 만남을 갖고 플럭서스(Fluxus)의 창립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되었으며, 이후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독일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같은 해 스톡홀름에서 액션뮤직 프로그램으로 ‘심플 Simple’ 퍼포먼스 초연, 쾰른에서 ‘머리를 위한 참선 Zen for Head’, ‘플라토니크 3번 습작 Etude Platonique No.3’ 등을 공연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TV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에서 텔레비전 13대와 피아노 3대, 소음기 등을 배치하고, 이 가운데 피아노 1대가 요제프 보이스에 의해 파괴되는 퍼포먼스를 시행했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비디오 아트의 선구적 활동을 전개한 백남준은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Sharlotte Mooreman)과 함께 음악,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Opera Sextronique》(1967)에서는 무어만이 상의를 드러낸 채 첼로 연주를 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백남준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작업을 했다. 1973년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에서는 존 케이지와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작품을 활용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은 예술 창작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1974년 《TV 정원 TV Garden》은 수많은 모니터의 사용을 통해 비디오 설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치 미술의 가능성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백남준은 1979년부터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며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82년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그의 첫 회고전이 열렸고, 1984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 Orwell》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1986년 제2편 《바이 바이 키플링 Bye Bye Kipling》, 1988년 제3편 《손에 손 잡고 Wrap around the World》를 연달아 발표했다.
그는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러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도시와 영상전(서울시립미술관, 1996), 교과서 미술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독일 비디오 조각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97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개인전(미국 국립미국미술관,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한국현대미술전-시간(호암갤러리, 1998)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백남준은 1996년 10월 독일 『포쿠스 Focus』지의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 월간지 『캐피탈 Capital』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올랐고, 같은 해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문화원(괴테 인스티튜트)이 비독일 국민에게 주는 ‘괴테메달’을 받았다. 또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98 교토상’을 수상했으며, 이어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서울의 로댕갤러리,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전 The Worlds of NamJune Paik’이 열렸다. 플럭서스에서 비디오 아트, 이후 레이저 아트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찾아 변혁을 꿈꿔 온 예술 탐험가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한국시각 1월 30일) 미국 플로리다주(州) 마이애미 자택에서 7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으며, 2008년 10월 경기도 용인시에 백남준 아트센터가 공식 개관했다.
그 밖의 주요 작품에는 《비디오 신시사이저 Video Synthesizer》(1969), 《TV 부처 TV-Buddha》(1974),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Moon Is the Oldest TV》(1975), 《다다익선 The more the better》(1988), 《전자 초고속도로: 미국 대륙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1995), 《엄마 Ommah》(2005) 등이 있다.
출처/월간미술, 두산백과,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