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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자 구산 스님 石獅子 九山GuSan Buddhist Monk
1909 ~ 1983
한국
서예
작가약력
- 1909∼1983. 승려.
작가 소개
본관은 진양(晉陽). 속명은 소봉호(蘇鋒鎬). 자호는 석사자(石獅子), 법호는 구산(九山). 법명은 수련(秀蓮). 전라북도 남원 출신. 아버지는 재형(在衡)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불교계의 정화운동과 가람 수호에 힘썼고, 해외 포교와 송광사의 국제선원을 발전시켰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세에 남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배웠다. 1935년 병중에 발심하여, 지리산 영원사로 들어가서 1백일 동안 천수기도(千手祈禱)를 드린 뒤 병이 나았다. 1937년 출가하여 1938년 효봉(曉峰)을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오계를 받았고, 1940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뒤 통도사 백련암(白蓮庵)에서 정진하였다.
1941년에는 해인사 백련암을 중건하였고, 1942년에는 금강산, 1943년에는 금릉군 수도암의 정각토굴(正覺土窟)에서 정진하였다. 1946년 해인사에 최초의 가야총림이 개설되자, 이곳에서 도감(都監)의 소임을 맡았다가, 다음 해 가야산 법왕대法王臺)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던 중 대중의 요청에 따라 최초로 설법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가야총림이 흩어지자 진주 응석사에 가서 정진하였고, 다음 해 효봉에게 오도송을 지어 보내자 효봉은 전법게를 지어 답하였다. 1954년 여름안거를 마치고 상경하여 교단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500자의 혈서를 써서 정화의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초대 전라남도 종무원장에 취임하였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塔殿)에서 안거하였으며, 1956년에는 조계종 중앙감찰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에는 광양 상백운암을 중건하고 주석하였으며, 1960년에는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피선되어 1967년까지 활동하였다. 1962년에 대구광역시 동화사 주지로 취임하여 절을 중건하였고, 1965년에는 주지직을 사임하고 금당선원에 머물렀다.
1966년 화상 자운(慈雲)과 세계불교승가대회에 참석한 뒤 동남아시아 불교성지를 순례하였고, 그 해 9월 효봉이 입적하자 사리탑을 제막한 뒤 1967년 3월 송광사 삼일암으로 옮겼다. 1967년 8월에는 다시 조계종 감찰원장으로 취임하였고, 1969년 4월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으며, 9월에 창립된 총림 후원 단체인 불일회(佛日會)의 총재 겸 총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3월 수선사(修禪社)를 중건하고 ‘3월 불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뒤 이 불사는 매년 개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쇠퇴해 가던 호남지방의 불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고려 때부터 계승되어 온 승보사찰(僧寶寺刹)의 면모를 새롭게 확립시켜 나갔다.
1972년 화상 운허(耘虛)와 함께 미국 카멜(Camel)의 삼보사(三寶寺) 개원식에 참석하고, 다음 해 미국인 제자 현조(玄照)와 귀국하여 송광사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4년 1월에는 송광사 서울분원인 법련사를 개원하였다.
1975년 불교의 생활화를 위하여 『칠바라밀(七波羅密)』을 발간하여 유포하였고, 1976년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법문을 모아 영역본인 『나인 마운틴즈(Nine Mountains)』를 출간하여 해외에 널리 소개하였다.
1979년 로스앤젤레스에 고려사(高麗寺)를 개원하여 해외 포교에 힘썼으며, 1980년에는 법어집 『석사자(石獅子)』를 간행하였다. 1982년 미주 순방 끝에 제네바에서 불승사(佛乘寺)를 개원하였고, 10월에는 카멜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원하였으며, 송광사의 국제선원을 세계 수준으로 이끌었다.
1983년 12월 16일 입적하였다.
1983년 12월 22일 다비식을 마친 뒤, 53과의 사리를 수습하여 삼일암에 탑을 세워 안치하였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세에 남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배웠다. 1935년 병중에 발심하여, 지리산 영원사로 들어가서 1백일 동안 천수기도(千手祈禱)를 드린 뒤 병이 나았다. 1937년 출가하여 1938년 효봉(曉峰)을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오계를 받았고, 1940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뒤 통도사 백련암(白蓮庵)에서 정진하였다.
1941년에는 해인사 백련암을 중건하였고, 1942년에는 금강산, 1943년에는 금릉군 수도암의 정각토굴(正覺土窟)에서 정진하였다. 1946년 해인사에 최초의 가야총림이 개설되자, 이곳에서 도감(都監)의 소임을 맡았다가, 다음 해 가야산 법왕대法王臺)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던 중 대중의 요청에 따라 최초로 설법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가야총림이 흩어지자 진주 응석사에 가서 정진하였고, 다음 해 효봉에게 오도송을 지어 보내자 효봉은 전법게를 지어 답하였다. 1954년 여름안거를 마치고 상경하여 교단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500자의 혈서를 써서 정화의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초대 전라남도 종무원장에 취임하였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塔殿)에서 안거하였으며, 1956년에는 조계종 중앙감찰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에는 광양 상백운암을 중건하고 주석하였으며, 1960년에는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피선되어 1967년까지 활동하였다. 1962년에 대구광역시 동화사 주지로 취임하여 절을 중건하였고, 1965년에는 주지직을 사임하고 금당선원에 머물렀다.
1966년 화상 자운(慈雲)과 세계불교승가대회에 참석한 뒤 동남아시아 불교성지를 순례하였고, 그 해 9월 효봉이 입적하자 사리탑을 제막한 뒤 1967년 3월 송광사 삼일암으로 옮겼다. 1967년 8월에는 다시 조계종 감찰원장으로 취임하였고, 1969년 4월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으며, 9월에 창립된 총림 후원 단체인 불일회(佛日會)의 총재 겸 총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3월 수선사(修禪社)를 중건하고 ‘3월 불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뒤 이 불사는 매년 개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쇠퇴해 가던 호남지방의 불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고려 때부터 계승되어 온 승보사찰(僧寶寺刹)의 면모를 새롭게 확립시켜 나갔다.
1972년 화상 운허(耘虛)와 함께 미국 카멜(Camel)의 삼보사(三寶寺) 개원식에 참석하고, 다음 해 미국인 제자 현조(玄照)와 귀국하여 송광사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4년 1월에는 송광사 서울분원인 법련사를 개원하였다.
1975년 불교의 생활화를 위하여 『칠바라밀(七波羅密)』을 발간하여 유포하였고, 1976년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법문을 모아 영역본인 『나인 마운틴즈(Nine Mountains)』를 출간하여 해외에 널리 소개하였다.
1979년 로스앤젤레스에 고려사(高麗寺)를 개원하여 해외 포교에 힘썼으며, 1980년에는 법어집 『석사자(石獅子)』를 간행하였다. 1982년 미주 순방 끝에 제네바에서 불승사(佛乘寺)를 개원하였고, 10월에는 카멜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원하였으며, 송광사의 국제선원을 세계 수준으로 이끌었다.
1983년 12월 16일 입적하였다.
1983년 12월 22일 다비식을 마친 뒤, 53과의 사리를 수습하여 삼일암에 탑을 세워 안치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