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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 권상하 遂菴 權尙夏Kwon SangHa
1641 ~ 1721
조선
작가약력
- 1641년(인조 19)∼1721년(경종 1). 조선 후기의 학자.
작가 소개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아버지는 집의격(格)이며, 동생은 우참찬상유(尙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660년(현종 1)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68년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留任)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시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송시열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남인의 정권에서는 관계에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였다.
1703년 찬선, 이듬해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이조참판과 찬선, 1712년판윤과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다.”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규(柳奎)를 비롯한 유생 8백여 명과 대사간이관명(李觀命), 수찬어유구(魚有龜) 등의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숙종 재위 중에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 상이론의 발상은 후천적인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본성을 동물성으로부터 분별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이처럼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이 중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되어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수록하고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660년(현종 1)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68년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留任)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시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송시열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남인의 정권에서는 관계에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였다.
1703년 찬선, 이듬해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이조참판과 찬선, 1712년판윤과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다.”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규(柳奎)를 비롯한 유생 8백여 명과 대사간이관명(李觀命), 수찬어유구(魚有龜) 등의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숙종 재위 중에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 상이론의 발상은 후천적인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본성을 동물성으로부터 분별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이처럼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이 중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되어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수록하고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