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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 유길준 矩堂 兪吉濬Yu GilJun

1856 ~ 1914

조선·근대

작가약력

  • 1856(철종 7)∼1914.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정치가.

작가 소개

1856년(철종 7) 10월 서울 계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기계(杞溪) 유씨이고,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이다. 그의 부친은 조선 말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유진수(兪鎭壽)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어려서부터 과거시험에 뜻을 두었고 외조부 이경직(李耕稙)에게 한학을 배웠다. 15세 때 경주 김씨와 결혼하여 청주에 머물다 서울로 상경하여 낙산서재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민영익(閔泳翊)을 만났다. 외조부 이경직의 소개로 박규수(朴珪壽)를 만나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박규수가 권한 《해국도지》등 개화사상서를 탐독하면서 세계정세에 관심을 두게 되었으며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김윤식(金允植) 등 개화사상가들과 교우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이 나라를 병들게하는 원인이라며 시험을 거부하였다.
1881년(고종 18) 민영익의 천거로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이때 신학문을 익히기 위한 유학의 목적이 있었다. 후쿠자와가 운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개화사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1882년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민영익의 귀국권유를 받고 조선의 개화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귀국하였다. 1883년 외무랑관(外務郞官)에 임명되었으며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漢城旬報)》 발간을 추진하였다가 박영효가 좌천되자 무산되고 말았다. 관직을 사퇴한 뒤 주미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을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대통령 체스터 아서 (Chester Alan Arthur)에게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그는 민영익의 권유로 미국에 남아 국비유학생으로 대학 진학을 위한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를 다녔다. 하지만 2년 뒤 국내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귀국하라는 고종의 친서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1885년 대서양을 건너 영국, 포르투갈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인도양을 건너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길에 일본에 잠시 머물며 김옥균을 만났는데 서울에 돌아오자 마자 개화당으로 몰려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889년에 탈고했다. 《서유견문》을 통하여 서양의 근대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장하였으며, 정부의 역할을 중시한 개혁론을 전개하여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였다. 또 갑신정변 이후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무단히 점령하여 거문도사건을 일으키는 등 조선을 둘러싸고 열강의 대립이 가열되자 열강이 보장하는 조선 중립화론을 제기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892년 연금에서 해제되고 동학농민운동을 핑계로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과 협상을 위해 외무(外務)의 주사로 발탁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外務參議) 등을 역임하며 개혁을 주도하였고, 1895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협판(內務協辦)을 역임하면서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적극 후원하였고 그해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겨우 목숨을 건져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여러권의 저서를 집필하였고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관들과 혁명일심회를 조직하였다. 의친왕(義親王)을 옹립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상하였다가 인천의 거부 서상집(徐相潗)의 밀고로 발각되어 하하시마(母島), 하치죠시마(八丈島)로 유배되어 3년을 보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1907년 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는 조선이 개혁에 실패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자초한 것이라고 보았고 나라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계략인 조선의 『자치육성책』을 오판하여 을사늑약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일병합을 용인하지는 않았으며 조선이 부강해지면 국권을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에서 남작(男爵)의 작위를 주었으나 거절했으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교육과 계몽사업에 헌신하였다. 모든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를 실천목표로 정하여 흥사단(興士團)을 발족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조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효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1914년 9월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저서에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 《영법로토 제국 가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 《대한문전(大韓文典)》 《구당시초(矩堂詩鈔)》 《구당선생집(矩堂先生集)》 《세계대세편(世界大勢編)》 《정치학(政治學)》 《평화광복책(平和光復策)》 《이태리 독립전사(伊太利獨立戰史)》 《파란쇠망전사(波蘭衰亡戰史)》 《구당서간집(矩堂書簡集)》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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