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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 윤효정 雲庭 尹孝定Yun HyoJeong

1858 ~ 1939

근대

작가약력

  • 1858(철종 9)∼1939.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작가 소개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운정(雲庭). 경기도 양주 출신. 심의성(沈宜性)은 사촌누이의 아들이고, 딸 정원(貞媛)은 한국 최초의 유럽 여자 유학생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탁지부주사로 근무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할 때 고종양위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일본 거류지에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고베(神戶)에 머물며 박영효(朴泳孝)·우범선(禹範善) 등과 조일의숙(朝日義塾)을 세워 우리 나라 유학생을 수용하였다.
우범선과 사귀는 동안 그가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의 관련자라는 것을 알고, 민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영근(高永根) 등을 시켜 우범선을 죽였다. 귀국하여 1905년 이준(李準)·양한묵(梁漢默)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치 체제를 목적하였다.
1906년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를 토대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민중을 기반으로 애국 인사를 포섭, 교육 확장과 산업 개발을 통한 한국의 자강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서, 전국에 25개 지부를 설치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당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당하였다.
이에 장지연·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유근(柳瑾)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 사업을 계승하였다. 대한협회의 총무로서 이 회의 기관지인 『대한협회회보』·『대한민보』를 간행하여 일제의 통감정치와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규탄, 공격하였다.
1908년 전국에 60여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는 등 강력한 애국단체로 성장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용한 금액이 1300만원의 거액에 달하자, 일제에 의한 경제적 예속이 주권 상실의 근본임을 판단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창신동에 숨어 살았다.
1919년 3·1운동 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철원으로 옮겼고, 1924년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로 이사하였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풍운한말비사」를 연재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홍만자회(紅卍字會) 한국 지부의 일을 맡아 보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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