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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용 金康容Kim KangYong
1950 ~
한국
서양화
작가약력
- 학력
- 1978년 홍익대학교 서양화 학사
- 198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 석사
- 기관 경력
- 한국미술협회 회원
- 오리진회화협회 회원
- 홍익대학교 출강
- 충남대학교 출강
- 숭의여자전문대 출강
- 전시
- 1983년-2010년, 개인전 (21회)
- 1978년, 제1회 앙데팡당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8년-1982년, 사실과 현실 78 회화전, 미술회관
- 1978년-1981년, 제1, 3-4회 중앙미술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9년-1985년, 제1-3회 71 회화전, 덕수미술관
- 1980년, 제2회 동아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 1980년, 한국미술연립전. 관훈미술관
- 1980년-1990년, 제22-23회 서울현대미술제, 미술회관
- 1981년, 현대문명비평전, 파리
- 1981년, 제1회 부산청년비엔날레, 부산 동방미술관
- 1981년, 제3회 국제청년작가표현전, 파리
- 1981년, 오늘의 상황전, 관훈미술관
- 1981년, 제1회 한·일 현대회화전, 미술회관
- 1981년-1991년, 에꼴 드 서울전, 관훈미술관
- ...
- 2002년, 팜비치 아트페어-박여숙 화랑, 팜비치
- 2002년, 샌프란시스코 아트페어-박여숙화랑, 샌프란시스코
- 2002년, 영혼의 바람전, 네팔미술관
- 2002년, 포스트 아트페어, 박여숙화랑
- 2002년, 생명의 터전, 양평미술관
- 2002년, 10인의 인상전 , 가모갤러리
- 2002년, 공평아트 개관10주년기념전, 공평아트센터
- 2002년, 멜버른 아트페어-박여숙 화랑, 멜버른 로얄전시장
- 2002년, 아트 퀼른-박여숙화랑, 퀼른 메세
- 2002년 9월 9일-9월 19일, Reality + Image, 박여숙화랑
- 2003년, 김강용전, 조현화랑
- 등 전시
- 수상
- 한국미술대상전 장려상
-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작가 소개
김강용은 195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1978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1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양화 전공을 졸업했다. 벽돌 그림의 작가인 김강용은 벽돌의 실재성을 원재료인 모래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생생하게 재현해 왔다.
1970년대 우리나라 미니멀(Minimal) 운동이 한국 화단의 집단 개성으로 등장한 이후 일군의 젊은 작가들은 이를 극복하고 산업 사회와 도시 문화를 바탕으로 한 극사실주의 화풍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석주, 고영훈과 같은 일군의 작가들이 한국추상미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사진으로 찍은 정지된 영상을 세밀 묘사를 하는 극사실 회화로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극사실 회화와 개념 미술의 요소가 가미된 미술 경향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중심적인 경향이 되었다.
그의 벽돌작업은 1974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벽돌은 김강용에게 <인간>과 <인간사회>를 의미하는 상징물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군부독재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로, 당시 청년 작가였던 김강용은 어느 상황 속에서도 상실 되어서는 안되는 사회구성원에 대한 존중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김강용의 벽돌은 자유자재의 구성으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가며 더 이상 재현된 대상으로서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신체를 이루는 세포처럼 화면을 유기적으로 작용시키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는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지만 다른 경우에는 원근법과 소실점의 질서를 무시한 혼돈의 구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인 색채의 벽돌에 파란색, 분홍색, 노란색 등의 색채가 가미되면서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것은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적 시도이지 벽돌의 환영이 결코 아니다. 그는 벽돌 그림을 통해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재현과 환경, 구상과 추상 등의 대립적 명제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보이는 것들의 명제를 넘어선 형이상학적 모색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 미니멀(Minimal) 운동이 한국 화단의 집단 개성으로 등장한 이후 일군의 젊은 작가들은 이를 극복하고 산업 사회와 도시 문화를 바탕으로 한 극사실주의 화풍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석주, 고영훈과 같은 일군의 작가들이 한국추상미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사진으로 찍은 정지된 영상을 세밀 묘사를 하는 극사실 회화로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극사실 회화와 개념 미술의 요소가 가미된 미술 경향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중심적인 경향이 되었다.
그의 벽돌작업은 1974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벽돌은 김강용에게 <인간>과 <인간사회>를 의미하는 상징물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군부독재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로, 당시 청년 작가였던 김강용은 어느 상황 속에서도 상실 되어서는 안되는 사회구성원에 대한 존중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김강용의 벽돌은 자유자재의 구성으로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가며 더 이상 재현된 대상으로서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신체를 이루는 세포처럼 화면을 유기적으로 작용시키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는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지만 다른 경우에는 원근법과 소실점의 질서를 무시한 혼돈의 구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인 색채의 벽돌에 파란색, 분홍색, 노란색 등의 색채가 가미되면서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것은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적 시도이지 벽돌의 환영이 결코 아니다. 그는 벽돌 그림을 통해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재현과 환경, 구상과 추상 등의 대립적 명제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보이는 것들의 명제를 넘어선 형이상학적 모색이라 할 수 있다.
출처/국립현대미술관, 월간미술